최근 몇 년간 미술 전시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복제품만 걸어놓고 입장료 수입을 챙기려는 ‘원화 없는 전시’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미술계에선 “돈벌이에 급급한 전시에 실망한 사람들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을까 걱정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알폰스 무하 전은 이런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다. 기획사는 ‘무하의 작품으로 만든 미디어아트와 31점의 원화를 함께 관람할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전시장에 걸려 있는 작품은 모두 판화, 즉 복제품이었다. 무하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리처드푸사재단의 작품을 인쇄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미술시장에서 수억원대에 거래되는 ‘특급 판화’도 아니다. 미술계에서 인정하는 ‘오리지널 판화’는 작가가 직접 품질을 검수하거나 친필 사인을 적어넣은 것이다. 이런 판화는 실제 작품 못지않게 가치를 인정받는다. 더현대서울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라울 뒤피 전시’의 석판화도 뒤피가 직접 검수한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이에 비해 작가의 검수를 거치지 않고 사후에 찍어낸 판화는 단순 ‘복제품’에 가깝다. 무하 전에 걸린 작품이 이런 사례다. 프린터로 인쇄한 탓에 픽셀이 깨져서 무하의 디자인 디테일이 잘 보이지 않는 작품도 있다.
문제는 전시장에 가보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 전시 포스터에 ‘복제 판화’라고 명확하게 쓰지 않아서다. 한 갤러리 대표는 “판화 전시는 수준이 낮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판화 전시라는 점을 사전에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원화 기반 전시’ ‘거장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 등 소비자를 헷갈리게 하는 문구도 많다. 무하 전도 기자간담회에서 ‘원화 기반 전시’라고 소개했다가 나중에서야 “전시장에 있는 포스터는 모두 최근 찍어낸 인쇄본”이라며 “원화라는 표현을 쓴 건 미디어아트가 원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무하 전 직전에 DDP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1960s 스윙잉 런던’도 비슷한 이유로 혹평받았다. ‘팝아트 거장’ 호크니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웠지만, 호크니 작품은 140여 점 중 60여 점으로 절반도 안 됐다. 그마저도 원작은 한 점도 없고 전부 판화와 포스터였다. 이러니 “호크니로 홍보해놓고 정작 호크니는 별로 없는 낚시 전시”라는 후기 글이 아트 커뮤니티에서 쏟아질 수밖에. CXC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앙리 마티스 서거 70주년 특별전’도 원화 하나 없이 전시작 150여 점을 모두 판화와 포스터로 채웠다.
DDP 같은 공공시설에서 이런 전시가 열리는 것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공공기관에서 열리니 어느 정도 보증된 전시’라고 생각하는 관람객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1월부터 올 7월까지 DDP의 가장 큰 메인 전시장인 전시 1·2관에서 열린 전시 10건 중 DDP 전시팀이 직접 기획한 전시는 3건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상업 전시기획사들이 마련한 전시였다.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 관계자는 “DDP 내 소규모 전시장에선 신진작가 전시 등 자체 기획 전시를 열고 있지만, 큰 전시장은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외부에 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원화 없는 전시’가 한국 미술의 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 평론가는 “한국 미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려면 일반 대중이 수준 높은 전시를 많이 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전시에 대한 실망감이 쌓이다 보면 미술에 대한 관심 자체가 식을 수 있다”고 했다.
이선아/최지희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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