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세부 지침 발표를 앞두고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IRA 수혜 대상이 될 '그린 수소의 범위'를 놓고 막판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면서다. 업계 일각에선 미국 정부가 엄격한 기준을 고집할 경우 유럽 등 다른 지역의 보조금 혜택을 받으러 미국 투자 철회를 검토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놓고 있다.
최근 수소 업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생산세액공제 혜택을 받게 될 청정 수소의 범위(45V)다. 미 정부는 수소의 탄소집약도에 따라 생산기업에 1㎏당 최대 3달러까지 세액공제를 해주기로 했다. 에너지 업계는 IRA 덕분에 미국의 수소 생산단가를 1㎏당 1.5달러로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수소 생산지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IRA가 발표된 이후 북미 대륙으로 향하는 청정 수소 프로젝트는 봇물을 이뤘다.
시장조사업체 리스타드 에너지에 따르면 2030년까지 미국 청정 수소 투자 규모는 110억달러에 달한다. 특히 관련 투자 발표는 IRA 발표 이후 53% 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매킨지는 올해 5월 발표한 자료에서 "유럽이 여전히 청정 수소 관련 전 세계 투자액의 35%를 차지하고 있지만, 미국은 IRA 발표 이후 15%까지 늘어나 단숨에 2위로 올라섰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조만간 확정될 IRA 세부 지침에 따라 미국행을 택했던 에너지 기업들의 명운이 갈릴 전망이다. 청정 수소의 범위에 대해 미 정부와 업계 간 '동상이몽'이 계속되면서다. 그린 수소는 수전해 설비에서 신재생에너지에 의해 깨끗하게 생산된 전기로 물을 분해해 만들어진다. 해당 기술력이 아직 걸음마 단계라 수전해 설비가 적은 양의 수소를 만드는 데에도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단체와 덴마크 베스타스 등 일부 신재생에너지 기업들은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제안했다. 본래의 그린 수소 의미에 알맞게 친환경 전기로 만들어진 수소에만 세액공제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선 수전해 설비의 전력 소비량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과 '시간 단위'로 매칭시켜 친환경 전력 사용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증명 기간을 늘려주면 한낮 시간대 등에 많이 만들어진 잉여 전력을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활용할 수 있다. 또는 그 기간 동안 화석연료를 통해 생산된 전력을 사용해 수소를 만들더라도 다른 곳에서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그린 수소 기술이 더 발전하고 비용이 감소할 때까지 산업을 활성화하려면 이 같은 양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미 정부를 향해 투자 중단 위협도 불사하고 있다. 앤디 마쉬 플러그파워 최고경영자(CEO)는 "세부 지침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기업들의 미국 투자에 가속도가 붙을 것인가, 아니면 유럽으로 눈을 돌릴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플러그파워가 의뢰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린 수소 인정 범위에 관한 세부 규칙이 엄격할 경우 2035년까지 예정돼 있는 미국 수소 투자 규모가 3분의 2로 줄어들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최대 신재생에너지기업 넥스트에라의 대관 담당 부사장인 필 머서는 "세부 지침이 미국 내 친환경 수소 산업의 성패를 가르는 순간이 될 것"이라며 "재무부가 느슨한 기준을 채택할 경우 2025년까지 미국에서 700억달러 규모의 친환경 수소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넥스트에라는 향후 세부 지침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미국 시장에 2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글로벌 화석연료 기업 BP와 셸, 엑슨모빌, 셰브런 등이 속한 청정수소미래연합의 섀넌 안젤스키 회장은 "시간 단위로 청정 전기 사용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에서 수소산업이 제대로 싹트기도 전에 매장시켜버리는 꼴"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청정전력협회(ACPA)는 "유럽연합(EU) 방식처럼 초기 시장 형성 단계에는 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부 수소기업들은 백악관의 IRA담당자인 존 포데스타에게 관련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CNBC는 "이번 IRA 논란도 결국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을 다시금 확인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미 재무부는 "에너지 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하루 빨리 지침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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