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파블로 피카소를, 누군가에겐 코코 샤넬을, 또 누군가에겐 장 폴 고티에를 떠올리게 하는 줄무늬 셔츠. 어쩌면 베레모와 함께 프랑스의 이미지를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는 브레통 셔츠는 명징하고 시원시원한 이미지로 패션 디자이너는 물론 옷 애호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템이다. 동시에 이보다 더 아이코닉할 순 없다는 면에서 결코 넘지 못할 산으로 여겨져 왔다. 약 10년 전 추성훈 선수가 자기 딸 사랑이를 안은 채 서로 다른 컬러의 브레통 셔츠를 입은 한 장의 사진을 봤을 때, 이 경쾌한 줄무늬 티셔츠를 향한 사랑이 한없이 깊어졌음을 고백한다. 소외당하고 외면받던 줄무늬, 계층적 혹은 사회적 선 긋기를 위한 수단이 어떻게 멋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냈는지 함께 알아보자.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동물은 무엇일까. 의문의 여지 없이 얼룩말이다. 흑백의 또렷한 줄무늬는 먼 곳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도심의 횡단보도가 얼룩말 무늬를 차용한 것은 안전을 위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시각적 효과는 일찌감치 죄수에게 적용됐다. 탈옥에 성공한 경우 도주를 막는 효과는 물론, 가로줄 무늬 죄수복이 세로로 늘어진 창살과 교차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을 주는 데 활용됐다는 설도 있다.
1858년 프랑스 해양부 장관인 페르디낭 알퐁스 아믈랭(Ferdinand Alphonse Hamelin) 제독은 법령을 통해 휘하에 있던 프랑스의 모든 선원에게 하얀색 바탕에 21개의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목이 넓은 티셔츠를 착용하도록 명령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21개의 푸른 줄무늬는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해전에서 일궈낸 21번의 승리를 의미한다. 아믈랭의 상관이었던 나폴레옹 3세를 향한 아첨과 전장의 병사들에 대한 사기 진작, 생명 보호라는 명분을 동시에 일궈낸 일석삼조의 의미심장한 디자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 유니폼의 디자인은 시각적인 효과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보트넥이라고 불리게 된 널찍한 목 부분, 짧은 7부 소매로 고안돼 물에 빠진 선원이 (아직 의식이 있다면) 쉽게 벗어 마치 깃발처럼 사용해 본인의 위치를 알리는 데 유용했다. 의식이 없더라도 재빨리 발견해 건져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적 측면도 있었다.
이렇게 ‘신박한’ 디자인을 안전 장비도 별로 없이 일하던 당시 어부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프랑스 해군 본부가 있는 브르타뉴 지역 어부들과 그 지역 양파를 수출하던 항구의 양파 상인들을 중심으로 ‘생명을 구하는 편리한 작업복’이 됐다. 품질 좋은 브르타뉴 양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소외된 하층민의 유니폼이 됐다. 그렇게 브레통은 또다시 소외당하고 외면받은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을 구분하는 ‘또렷한 줄 긋기의 수단’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 유니폼은 장교가 아니라 갑판이나 배 하부에서 생활하는 하급 장교와 일반 병사에게 지급된 것이었다. 사관학교를 통해 장교가 된 이들은 갑판병에서 진급하는 장교를 천대하며 얼룩말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 천하고 보잘것없는 줄무늬 셔츠는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한 자유주의자 샤넬에 의해 모두가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로 신분 상승을 꾀하게 된다. 1912년 브르타뉴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도빌에 정착한 샤넬은 바닷가에서 자주 목격되던 줄무늬 작업복을 보며 영감을 얻는다. 1917년 맞춤복 컬렉션에 오리지널 브레통 셔츠를 변형한 짧은 셔츠를 도입했다. 여성의 자유를 위한 중성적 매력의 브레통 셔츠를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1930년대엔 급기야 본인이 죄수와 바다 노동자가 입던 줄무늬 니트 티셔츠를 입고 바캉스를 즐기면서 당시의 영향력 있던 문인과 화가 그리고 셀러브리티에게 편안함과 자유를 선사했다. 본격적이고 완벽한 브레통 셔츠의 신분 상승이 이뤄진 것이다.
이쯤 되면 당신을 돋보이게 하고 심지어 더 날렵하게 보이게 해줄 가로줄 무늬 셔츠, 구구절절한 역사를 지닌 브레통 셔츠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올여름, 너무 커서 헐렁하지 않아 몸에 잘 맞는 브레통 셔츠로 인문학적 멋 내기를 해보길 권한다.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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