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의원들이 탈원전을 요구하며 영구 방폐장 건설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법안은 원래 김성환 민주당 의원이 2021년 9월 먼저 발의했다. 당시 탈원전 기조에 따른 기존 원전의 ‘질서있는 퇴장’을 위해서도 방폐물 영구처분시설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고 친(親)원전으로 에너지 정책이 바뀌자 야당 입장도 180도 바뀌었다. 탈원전을 전제하지 않은 영구 방폐장이 원전의 계속운전과 신규 건설을 오히려 뒷받침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영구 방폐장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내 습식 저장시설에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고 있다. 문제는 이 시설이 빠르게 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 기장 고리원전은 포화율이 87.6%에 달해 5년 후인 2028년엔 저장시설이 꽉 찬다. 별도의 시설 투자를 통해 2032년까지 기한을 늘릴 수 있지만 임시방편이다. 전남 영광 한빛원전도 포화율이 78.7%로, 2030년 가동이 중단될 판이다. 경북 울진 한울원전의 1~6호기 저장시설은 무려 91.4%가 채워져 있다. 그나마 새로 가동을 시작한 신한울1호기 저장시설을 공유하면서 포화율이 76.3%로 떨어졌지만 포화 시점이 2031년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야당이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영구 방폐장 건설을 사실상의 탈원전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한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야당에선 화장실(방폐장)을 막아버리면 밥(원전 가동)을 못 먹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영구 방폐장은 친원전 또는 탈원전의 미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원전을 사용한 결과에 대한 책임 문제”라고 꼬집었다.
영구 방폐장 건설을 막을수록 기존 원전 지역 주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라는 지적도 많다. 영구 방폐장이 지연되면 기존 원전 내 건식저장시설을 추가 설치할 수밖에 없는데, 해당 지역주민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영구 방폐장 건설이 추진되면 완공 전 중간저장시설을 지어 기존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를 전부 이동할 계획이다.
법안이 좌초 위기에 처하자 경주·울진·영광·기장·울주 등 원전 소재 5개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은 오는 16일 서울 여의도에서 고준위방폐장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는 상경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이들 지자체는 지난 6월에도 특별법 입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사안”이라며 “소모적인 논쟁으로 골든타임을 놓치고 원전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영구 방폐장은 부지선정 절차에만 13년이 걸리고 최종 완공까지 37년이 걸리는 사업”이라며 “이제는 뒤로 미룰 수 없는 정말 시급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사용후핵연료 등 방사능 노출이 많은 폐기물.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원전에서 사용된 작업복, 신발 등 방사선 노출이 적은 폐기물이다.
박한신/이슬기 기자 p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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