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해안가의 쓰레기를 일일이 기록한 사나이

입력 2023-08-09 17:40   수정 2023-08-10 15:50


예술가들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알다시피 대개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자신의 작품을 미사여구로 홍보해 몸값을 올리는 데만 몰두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민중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만 골몰하는 사람, 여성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서 뒤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예술에 대한 대중의 환멸만 가중할 뿐이다.

정재철(1959~2020)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건, 그가 진심으로 예술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드문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젊은 유망 조각가로 잘나가던 그는 어느 날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돈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일에 삶을 바쳤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버려진 현수막으로 사랑과 평화를 표현한 ‘실크로드 프로젝트’,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국내외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서울 회현동 금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끝나지 않는 여행’은 정 작가의 3주기를 기념하는 추모전이다. 정 작가가 생전 남긴 작품 다섯 점,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그를 사랑했던 동료와 선후배 25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전시는 정 작가의 연인이었던 황연주 작가의 기획으로 성사됐다.

30대 시절의 정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조각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김세중 청년조각상 등 조각계의 굵직한 상을 휩쓸며 나무 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앙미술대전이 보내준 유럽 여행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정 작가는 생각했다.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미술이다. 여행을 떠나자.’

2004년 3월 정 작가는 한국에서 수집한 폐현수막을 17개국 50여 개 지역 현지인들에게 나눠준 뒤 현수막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기록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가 어떻게 만나는지, 현대 사회에서 재활용이라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7년에 걸친 작업 기간에 보습학원과 대출 상품을 광고하던 현수막은 인도의 가정집 쿠션이 됐고, 중국 오지에 있는 과일 상점의 천막이 됐고, 파키스탄 청년의 가방이 됐다. 그 대부분은 현지에 두고 왔지만, 대신 전시장에서는 작가가 현수막으로 만든 파우치를 만날 수 있다. 2013년 황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선물한 파우치다.


그다음으로 정 작가가 시작한 게 블루오션 프로젝트다. 전국의 바닷가에서 해양 쓰레기를 모아 조형물을 만들었다. 어느 앞바다에 어떤 쓰레기가 많이 떠다니는지를 그린 ‘한국 바다 쓰레기 지도’도 제작했다. 전시장에 나온 ‘제주일화도’(2019)는 그 대표작 중 하나로, 올해 광주비엔날레 병행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고행에 가까운 일들이었지만 정 작가는 고집스러웠다. 황 작가는 “정 작가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작가였다”며 “사명감을 갖고 작업해나가는 과정이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미술계 많은 사람들이 정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됐다. 25명에 달하는 그의 선후배, 제자 등이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내놓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강장원 작가가 출품한 ‘사물의 기억들’이 대표적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가를 돌며 수집한 유리와 에폭시수지 등을 재료로 ‘큰 그릇’이었던 정 작가를 추억하며 만든 그릇이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던 정 작가는 2020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이랬다. “작품 잘 가지고 있어. 전시하자는 데가 있으면 다 내줘. 어쨌든 내 작품이 필요한 시대는 계속될 거니까.” 이번 전시는 오는 24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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