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에는 한국 신차 개발의 뿌리가 된 ‘전설의 노트’가 전해진다. 한국 최초 대량 생산형 고유 모델 ‘포니’의 개발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일명 ‘이 대리 노트’다. 국내에 자동차 설계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던 1970년대 이 대리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포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대리는 훗날 연구개발본부 사장까지 오른 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78)이다. 포니부터 에쿠스까지 34종의 차량이 그의 손을 거쳤다. 퇴임 후에는 한국자동차공학한림원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최근 현대차가 ‘포니 쿠페 콘셉트’를 복원하면서 이 전 사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대차가 ‘포니의 시간’ 전시를 열고 있는 서울 논현동 현대모터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포니를 개발한 지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의 기억은 선명했다. 이 전 사장은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산업을 제대로 키워야 하겠다’는 꿈을 오래전부터 갖고 계셨다”며 “그의 의지가 없었다면 한국은 자동차공업을 시작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현대차가 진정한 미래 모빌리티의 글로벌 톱티어로 올라서기 위해선 다시 ‘정주영의 도전과 혁신 DNA’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포니 쿠페 콘셉트가 49년 만에 복원됐습니다.
“포니 쿠페 콘셉트는 현대차가 독자 생산한 포니와 함께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어요. 세련된 디자인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죠. 생산 직전까지 갔지만 1979년 오일 쇼크 등 글로벌 경기 침체로 양산을 못 했습니다. 복원 모델을 다시 볼 수 있게 돼 정말 기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제가 살던 동네는 자가용은커녕 버스도 없는 시골이었습니다. 신작로를 다니는 건 미군 군용차가 전부였지요. 아버지가 방앗간을 운영하신 덕분에 기계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 63학번인데 입학 때 처음으로 자동차공학 전공이 생겼어요. 1기로 입학했죠.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유일한 실습 기재인 지게차를 몰고 나가 한마디로 ‘꼬라박으면서’ 실습했어요. 체계적인 경험을 쌓은 건 학군장교(ROTC) 수송병과 정비담당 장교로 복무하면서부터입니다.”
▷제대 후 바로 현대차에 입사했나요.
“입사가 1969년이니까, 현대차가 설립된 지 2년 무렵입니다. 당시 현대차는 포드의 ‘조립 생산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루 세 대 정도 조립하던 시절이죠. 대학생 때 청계천 헌책방에서 포드 정비 매뉴얼을 자주 접한 저에게 포드는 우상이었습니다. 당시 현대차 로고 아래 ‘Assembler of Ford’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으니 입사하려고 생각한 건 당연했지요. ROTC 출신은 가산점까지 있다는 소식에 고민할 것도 없이 지원했습니다.”
▷‘포니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합류했습니까.
“입사 초기엔 울산공장에서 품질검사 업무를 했어요. 2년 정도 지나니 주행테스트 업무가 주어졌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서울로 발령이 났습니다. 어느 날 기획실에서 부르기에 갔더니 ‘포니 프로젝트를 하려는데 할 수 있겠냐’고 하시더군요. 무조건 한다고 했죠. 그렇게 이탈리아로 설계 기술을 배우러 떠났습니다. 1974년 2월 4일, 제 나이 스물아홉 때였습니다.”
▷독자 모델 개발에 반대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회사 안팎에선 ‘허황된 꿈’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독자 개발에 반대 의견을 드러내자 선대회장이 ‘우린 반대해도 한다면 한다. 꼭 하고 만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선대회장은 자동차산업을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꿈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이동 혁신을 통해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끄는 것이 원대한 목표였던 것입니다.”
▷‘이 대리 노트’는 어떻게 작성했습니까.
“포니의 스타일링 용역을 맡은 ‘이탈디자인’은 토리노 교외에 있었습니다. 갔더니 13m짜리 제도판 두 개와 100㎜ 간격의 라인만 그려진 제도용지가 깔려 있더군요. 작업자가 설계하는 것을 눈여겨봤는데 첫날엔 용지에 점이 하나 찍혔고, 1주일 뒤엔 선이 하나 그려져 있었어요. 매일매일 작업 과정을 있는 그대로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노트에 포니 개발 프로세스 전반을 담을 수 있었죠. 이 노트가 오늘날 현대차 신차 개발의 기초 프로세스를 다졌습니다.”
▷자동차는 디자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엔진을 직접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요. 엔진 기술을 공여할 회사를 찾기 어려워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러다 선대회장이 구보 도미오 당시 미쓰비시 회장을 만나 양해각서를 받아오면서 극적인 진전이 이뤄졌어요. 미쓰비시는 후륜 구동 엔진과 변속기, 섀시 부문에서 포니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2년 만에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12월 22일 도면을 가지고 귀국하니 1년 안에 차를 생산해내야 하는 상황이어서 ‘큰일이다’ 싶더군요. 선대회장의 도전 정신과 강력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못 했을 겁니다. 선대회장은 난관을 만날 때마다 같이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며 함께 문제를 풀었습니다. ‘부품이 없어 진행이 안 된다’고 하면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하나하나 물어보며 해결해주셨어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필요하지’라며 논의하고, ‘한국에는 없다’고 하면 ‘선진국에서 찾아보자’고 하셨죠. 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포니는 출시되자마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1975년 12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 처음 출고했어요. 한국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고유 자동차 모델을 개발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포니는 힘이 좋은 차였어요. 내구성도 당시로서는 수준급이었고요.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까지 반영한 차였습니다. 덕분에 출고 첫해에 무려 1만726대를 판매했습니다. 국내 승용차 시장 점유율 44%라는 수치만 봐도 엄청난 결과였죠.”
▷수출은 어떻게 성공했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미쓰비시의 후륜 구동 플랫폼은 한 세대 뒤처진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장점은 빽빽한 전륜 구동 엔진룸에 비해 후륜 구동 엔진룸은 휑하니 비어 있어 정비하기 수월하다는 것이었죠. 북미에서는 인건비가 비싸다 보니 자가 정비가 많은데 후륜 구동이 장점으로 작용해 캐나다에서 포니 붐을 일으켰어요. 1984년 캐나다에 진출한 지 2년 만에 수입차 부문에서 도요타, 혼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자 북미 언론들은 연일 대서특필했습니다. 미국 시장 진출 계기가 마련된 거죠. 자동차를 국가 중추 수출산업으로 육성해 국민의 삶을 더 낫게 하길 염원하던 선대회장의 수출보국 정신 덕분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에 진출한 건 포니 다음 모델인 국내 첫 전륜 구동 승용차 ‘포니 엑셀’이었어요. 1985년 선보인 포니 엑셀은 1986년 미국 시장을 두드려 그해에만 약 17만 대를 판매하는 돌풍을 일으켰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고 미국 진출 3년 뒤부터는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했죠.”
▷어떤 문제였습니까.
“번호판 램프 과열, 엔진의 불안정한 ‘아이들 RPM’, 배터리 방전, 각종 호스의 누수·누유, 제대로 조립되지 않은 부품, 라인 작업자 장갑의 기름때가 묻은 내장 부품 등 원시적인 문제점이 다양하게 나타났어요. 아무래도 저렴한 차량이다 보니 초반에 포니 엑셀을 구입한 고객은 대체로 소득 수준이 낮은 편이었고 차량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 발생이 더욱 빈번했어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우리는 뼈저린 학습을 했어요. 추락한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10년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됐기 때문이죠. 우선 현지에 맞는 차를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였어요. 현지 시장을 철저히 분석하고 해외 경쟁 샘플카를 모두 수입해 우리 차와 세세한 것까지 비교했어요. 해외 현지 주행 평가뿐 아니라 현지 도로를 측정해 울산에 똑같은 시험로를 조성하고 시험하면서 개선해 나갔죠. 미쓰비시 플랫폼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고유의 엔진 등을 개발해 상품력도 높였습니다. 1997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경쟁 모델을 둘러보고 나니 드디어 미국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10년 동안 와신상담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이는 다음해 미국 시장에 도입한 ‘10년·10만 마일 무상 보증’이란 품질 경영으로 이어져 북미 시장에 안착하는 쾌거를 이뤘어요.”
▷포니를 시작으로 성공 신화가 이어졌습니다.
“더 큰 차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선대회장의 지시로 1983년 중형차인 스텔라가 탄생했습니다. 소형차 포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으신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만 혼을 쏟아부어 만든 차인 데다 ‘88 서울울림픽’ 공식 차량이 돼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1985년 선보인 쏘나타도 선대회장이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스텔라를 경쟁 모델이었던 대우 레코드로얄보다 더 고급스럽게 만들라고 지시하셨어요. 앞뒤 범퍼를 고급 크롬 몰딩으로 번쩍번쩍하게 하고 라디에이터 그릴을 키우되 6개월 만에 끝내라는 지시였습니다. 무조건 ‘예스’였죠. 선대회장 지시로 차 이름까지 쏘나타로 바꿨습니다. 그게 시장에서 먹혔습니다. 바꿔야겠다는 회장님의 결단이 주효한 것입니다.”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포니는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든 차를 만들어본 경험, 도전을 통해 얻은 결과물로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이후 다양한 모델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선순환 구조의 시작을 포니가 이끈 셈이죠. 현대차의 도전이 이뤄낸 혁신이 오늘날 현대차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포니는 오래전 있었던 옛날 자동차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정신적, 경험적, 물리적 유산입니다.”
▷현대차는 이제 글로벌 톱티어를 향해 달려갑니다.
“전 이미 ‘빅3’에 들어갔다고 봐요.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국가는 독일, 일본, 그리고 한국뿐입니다. 자만할 순 없어요. 앞으로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AI) 전자장비를 장착한 차량, 달리는 사무공간이나 집 같은 새로운 융합 차량도 등장할 겁니다. 포니 DNA를 가진 현대차는 언제나 앞장서 경쟁력을 키워갈 겁니다.”
■ 이충구 약력
△1945년 충북 영동 출생
△1963년 경기고, 1967년 서울대 공업교육과 졸업
△1969~1993년 현대차 기술개발부
△1993~1999년 현대차 연구개발본부장(부사장)
△1999~2002년 현대차 통합연구개발본부장(사장)
△2001~2003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2012~2016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원 지능형자동차플랫폼센터장
△2014년~ 한국자동차공학한림원 회장(2021년~ 명예회장)
김일규/빈난새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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