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아시아’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마이너다. 주인공은 예나 지금이나 ‘백인 남성’이다. 2021년 11월 세계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가 포디엄을 ‘아시아 여성’에게 내줬을 때 큰 이슈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때 그 자리에 섰던 지휘자가 성시연(47)이다. ‘게오르그 솔티 콩쿠르 우승자’ ‘미국 보스턴 심포니 137년 역사상 첫 여성 부지휘자’ ‘명문 악단들의 러브콜이 줄을 잇는 지휘자’ 등 그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설명이 따라붙는다. 그런 성시연이 오는 3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한경아르떼 더클래식 2023’ 일곱 번째 공연에서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리게티, 라벨의 작품을 들려준다.
지난 11일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난 성시연은 듣던 대로 ‘팔색조’ 같았다. 인터뷰 내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똑부러진 모습만 보이더니, 한순간 옆집 언니 같은 따뜻함을 보이기도 했다.
성시연은 “지휘자에겐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며 “공연에서 표현하고 싶은 모든 걸 머릿속으로 완벽히 정리한 뒤 연주에 온전히 녹여내야 한다. 최상의 사운드를 만드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시연은 ‘쉬운 길’보다는 ‘험난한 길’에 도전하는 지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레퍼토리를 골랐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인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 피아노 협주곡 4번(피아니스트 이진상 협연)으로 문을 연 뒤 20세기 음악인 리게티의 ‘콘서트 로마네스크’,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으로 무대를 채운다. 베토벤을 제외한 두 곡 모두 국내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곡이다.
“리게티의 ‘콘서트 로마네스크’를 들으면 여러 악기가 주선율을 변주하면서 악상을 발전해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동화에서 착안한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은 회화적인 요소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죠. 많은 분들이 흔히 갖고 있는 ‘20세기 이후 음악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깰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아낼 겁니다.”
성시연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공부하던 피아니스트였다. 돌연 진로를 바꾼 건 20여 년 전 ‘전설의 지휘자’ 고(故) 푸르트 벵글러의 공연 영상을 접하면서다. “벵글러가 지휘하는 영상을 보는데 순간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어요. ‘저 많은 연주자의 소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지휘자의 실력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어쩜 저렇게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이런 호기심이 생겼죠. 그렇게 제 몸과 마음은 지휘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어요.”
독학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2001년 한스 아이슬러대 지휘과에 들어갔다. 지휘자로서의 재능이 드러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6년 게오르그 솔티 콩쿠르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듬해 구스타프 말러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올랐다.
그렇게 ‘지휘자 성시연’의 이름값은 갈수록 높아졌다.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2022년에 이어 올 11월 연주 지휘봉도 성시연에게 건네기로 했다. 지난해 호흡을 맞춘 영국 로열 필하모닉도 내년 2월 공연을 다시 성시연에게 맡겼다. 명문 악단들이 지휘자를 재초청한다는 건 ‘실력 검증’이 끝났다는 의미로 통한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성시연은 손사래를 쳤다.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공연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덕분에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니 계속 노력할 수밖에요. 명문 악단들이 저를 재초청하는 건 이런 저의 노력을 좋게 평가한 게 아닌가 합니다.”
성시연은 “총보를 공부할 땐 짧은 음 하나도 완벽하게 머릿속에 저장될 때까지 파고든다”며 “각 선율의 색채, 악상, 감정 표현의 농도까지 다 구상한 뒤에 리허설에 들어간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지휘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성시연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요즘 들어 ‘독보적인 사운드를 가진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거장들의 음반을 들어보면 어떤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도 꼭 들리는 그 사람만의 소리가 있어요. 저도 그런 지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성시연 사운드’를 갖는 것, 지휘자로 이것보다 더 큰 숙제이자 선물이 또 있을까요.”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