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국내 직급제도의 키워드는 ‘직급 파괴’ 다. 직급 파괴를 통해 회사는 수평적 문화를 조성하고,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 강화를 목표로 한다. 삼성, 현대차, SK, CJ 그룹 등 국내 주요 기업은 직원의 직급 단계 축소에 이어 임원 직급까지 통합하며 이러한 흐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초창기 직급 파괴를 시행한 기업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다. 직급이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조직 내 커리어 비전을 제시하는 기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수평적 문화 조성을 위해 축소된 직급단계는 구성원의 승진 기회 축소로 이어졌다. 한두 차례의 승진 후 정년까지 15년 이상을 같은 직급에서 보내야 하기에, 조직 내 성장 비전이 희미해졌다. 또한 10년에 한 번 오는 승진 기회에 승진자보다 승진 누락자의 동기 저하가 부각되었다. 승진은 매년 대규모 동기 저하자를 양산했고, 이는 승진 전후 구성원의 이탈로 이어졌다.
이에 일부 기업들은 직급 파괴 이후의 직급체계를 그리고 있다. 눈에 띄는 모습은 기존 직급을 레벨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레벨제는 전문성에 초점을 둔 관리체계다. 기존 직급과 연공적 요소에 관계없이 레벨이라는 새로운 성장단계를 통해 구성원의 성장 니즈를 충족하고, 전문성 수준에 따라 구성원을 인정하고 보상한다. 국내에서는 IT 기업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서구권에서는 보편적으로 직무가치 기반 다단계의 레벨제를 활용한다.
레벨제에는 어떤 형태가 있을까? IT 기업이 아닌 일반 대기업에서도 시행 가능한 제도일까? 최근 직급 파괴 이후 레벨제를 고민한 국내 대기업의 사례와 서구권 대기업의 사례를 통해 직급 파괴 이후의 직급체계에 대해 가늠해 보자.
국내 첨단 제조 대기업인 A사는 레벨제 전환의 선두주자다. 2010년대 후반 전통적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의 5단계 직급체계를 2단계로 통합한 후, 구성원 성장 동기부여 강화와 커리어 비전 제시 필요성을 마주했다.
고민 끝에 A사는 기존 ‘역할’ 중심의 직급체계에서 구성원의 ‘전문성’에 집중한 체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한다. 업무 전문성 향상을 통해 조직 내 커리어 비전을 찾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직무 분류 체계를 정비하고, 전문성을 판단하기 위한 인프라인 직무별 스킬셋(Skill-set)을 구축했다. 직무 별 주요 업무와 그에 요구되는 스킬을 기반으로, 구성원 전문성 수준을 측정하고 레벨을 부여했다. 더불어 제도변화에 대한 구성원의 효익 체감을 위해 레벨에 따라 수당을 차등적으로 지급했다. 구성원은 총보상의 상승효과를 체감할 수 있고, 회사는 운영 리스크가 적으며 유연한 보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A기업은 구성원 수용성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제도를 도입하고, 계속적으로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전문성에 초점을 둔 레벨제를 통해 구성원의 전문성 관리는 물론, 회사의 경쟁력 강화를 기대하고 있다.
시가총액 160조 원의 글로벌 바이오 기업인 암젠(Amgen)은 24단계로 운영하던 직급을 12단계로 축소했다. 12단계도 일견 많게 느껴질 수 있으나, 기존 24단계에서 축소된 것이 구성원에게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 직급단계 축소에 따라 호칭이 강등되는 사례가 발생했으며, 퇴사율도 증가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암젠은 'Global Career Framework Refreshment'라는 이름의 직급체계 개편에 착수했다. 12단계의 글로벌 표준 직급단계를 기준으로, 직군 별 특성을 반영하여 직급단계를 ‘서브-레벨’로 세분화했다. 사업의 핵심이자 전문성 수준 관리가 용이한 연구개발(R&D) 직군의 서브-레벨 단계를 가장 세분화했고, 서브-레벨 별 호칭도 부여했다.
레벨 상승을 위한 제도 운영도 변화했다. 과거 대비 구성원에게 잦은 성장감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R&D 직군을 대상으로 연 2회 레벨 상승 기회를 제공하고, 우수인재에 한하여 서브-레벨을 2단계 상승할 수 있도록 하는 특진제도를 도입했다. 동시에, 예비 리더 직급의 승진 기준을 엄격하게 설정했다. 직원의 가장 상위 레벨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임원 추천의 허들을 두고, 승진 후보자에 대해 논의하는 조정회의(Calibration Session)에서 해당 임원이 추천 대상자에 대해 프레젠테이션(PT)하도록 했다. 이처럼, 구성원의 성장 기회를 확대하는 동시에 엄격한 승진 검증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직급체계 개편 후 구성원 퇴사율은 감소했고, 암젠은 현재 글로벌 혁신 신약 및 바이오시밀러 시장의 선두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두 기업에서 살펴본 직급 파괴 이후의 새로운 모습은 레벨 체계로의 전환 또는 서브-레벨 도입을 통한 세분화이다. 이를 우리 기업의 모습에 맞게 효과적으로 적용하려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먼저, 성과창출 특성을 고려한 레벨 요건을 정의해야 한다. 레벨을 정의하는 요건은 성과 영향력, 업무의 난이도·복잡성, 문제 해결력, 전문지식·스킬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 이 중 기술 중심의 전문성이 중요할 경우 전문 지식 또는 스킬을, 업무상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범위와 그 방법이 중요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을 주 요건으로 설정할 수 있다.
레벨 단계는 사업 전략, 현재 구성원의 전문성 수준을 고려하여 설정해야 한다. 회사가 가파른 성장세이거나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있을 경우, 현 구성원의 전문성 단계보다 더 많은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향후 고직급 우수인재 영입 혹은 인수합병 후 기업간 직급체계 통합 시의 유연성을 위해서다. 구성원 성장 동기부여를 위해 전략적으로 특정 직군의 전문성 단계를 세분화하여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레벨제와 보상의 연계는 다양한 옵션을 고려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존 직급체계와 레벨제를 병행하여 운영할 경우 레벨과 연계한 수당으로, 기존 직급체계를 폐지하고 레벨제로 완전 전환할 경우 기본급으로 연계한다. 레벨 상승 시 일회성 인센티브를 지급하거나, 기존의 기본급 중 일부를 분할하여 레벨제와 연동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기업의 레벨 별 인력 분포의 변화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측한 필요 재원 규모, 사업 상황, 구성원 수용성, 제도 변화 체감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해야 한다.
설계가 아무리 완벽해도 제도가 잘 활용되려면 주체인 구성원의 이해와 수용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왜 변화하려고 하는지’, ‘구성원 관점의 변화 효익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변화 효익은 구성원 개개인에게 찾아올 변화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소통방식도 중요하다. 회사와 구성원이 함께 주체가 되어 변화한다는 메시지를 나타내야 한다. 과거와 같이 제도를 다 만들어 놓고 공청회, 간담회 등을 통해 결과만 공유하는 소통은 구색 맞추기용 ‘쇼통(Show통)’으로 느껴지기 쉽다. 제도 개편의 검토 과정 중 구성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 제도 개편의 TF 멤버로 현업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것도 방법이다. 투입되는 리소스는 커질지라도 변화된 제도는 살아 움직일 것이다.
인구학자인 서울대학교 조영태 교수는 향후 2030년이면 노동 가능 인구의 부족으로 기업 간 인재의 무한 경쟁기에 돌입할 것이라 전망한다. 노동 가능 인구가 지속해서 줄어들 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이기에, 인재의 무한 경쟁기에 구성원 동기부여와 전문성 관리가 더욱 강조될 것임은 예측 가능하다. 그것을 인사의 근간인 직급체계로 풀어낸다면, 직급 파괴 이후의 모습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인사제도 연결망의 새로운 중심축을 고민해봐야 할 때다.
남원진 MERCER Korea 선임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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