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엔 '쿨함'이 세상의 전부였다[책마을]

입력 2023-08-15 19:30   수정 2023-08-15 19:31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었던 1990년대는 좋은 시절로 기억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공산권과 자유 진영의 냉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은 역사상 가장 긴 경제성장기를 누렸다.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쉽게 볼 수 있게 되면서 영상문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인터넷의 문이 열리면서 디지털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1990년대는 과연 좋은 일만 가득하던 시기였을까? 좋은 일만 기억에 남는 ‘추억 보정’ 때문에 90년대 향수가 강력하게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평론가인 척 클로스터만은 <90년대>에서 1990년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복원하며 그 시대를 규정하는 핵심 정서를 드러낸다.

1990년대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록밴드 너바나의 등장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전 세대의 이데올로기에 혐오감을 느낀 젊은이들은 도처에 침투하는 시장 만능주의에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른바 ‘쿨함’이 전부였던 X세대의 등장이다. 너바나는 기존 록밴드의 상업주의를 배격한 대안(얼터너티브) 음악을 펼쳤다. 꿈도 야망도 없는 냉소적 정서에 X세대는 열광했고 너바나는 1990년대의 아이콘이 됐다.

획일화된 대중문화에 대한 반란은 영화계에서도 일어났다. 90년대 초반 독립영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영화들은 애국심과 같은 보편적 정서가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했다. 노골적인 폭력을 드러내기도 하고 동성애 같은 소수 문화를 주제로 삼기도 했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을 내놓은 퀸틴 타란티노는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였던 1990년대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연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1991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며 지지율이 치솟았던 부시는 불과 1년 만에 치러진 대선에서 패배했다. 걸프전은 TV로 생중계되는 최초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전쟁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은 전쟁이었다. 걸프전은 다른 TV 프로그램들처럼 빠르게 잊혀졌다.

1990년대에는 중요한 정치적 구호나 이슈는 없었다. 무심함 쿨함이 세상 전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불안은 싹트고 있었다. 1999년 콜럼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학살과2001년 9·11 테러와 함께 90년대의 태평했던 시대는 막 내렸다.

최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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