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에 열리는 영국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대 공연 축제다. 올해 축제엔 세계 48개국에서 온 2000여 명의 아티스트가 295개 공연을 준비했다. 검증받은 공연만 고르고 골랐다지만, 이 많은 공연이 모두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언론들은 축제가 열리기 전에 ‘꼭 봐야 할 공연’ 리스트를 작성하고, 끝난 뒤엔 리뷰를 남긴다.
국립창극단이 만든 ‘트로이의 여인들’은 이런 점에서 ‘EIF를 빛낸 주연’이었다. 현지 유력 신문인 가디언의 평가를 보면 감이 온다. 공연 전에는 ‘꼭 봐야 할 공연’으로 꼽혔고, 공연 후엔 만점(별 다섯 개)을 받았다.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판소리로 읊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묘한 조합에 객석을 가득 메운 서양 관객들은 열광했다. 공연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다.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 대체 이런 ‘묘한’ 작품은 누가 썼고, 이처럼 그럴듯하게 무대를 꾸민 이는 누굴까. 지난 11일 공연이 열린 에든버러 페스티벌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이 작품을 낳은 ‘부모’를 만났다.
옹켄센이 판소리를 처음 접한 건 25년 전(1998년)이었다. 첫 방한 때 만난 안숙선 명창의 ‘춘향’에 빠져든 뒤 창극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은 미니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별다른 반주 없이 고수가 치는 북 장단에 맞춰 소리꾼 목소리 하나로 온전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극 장르는 흔치 않다”고 했다.
이 작품의 원전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해 고통받은 트로이 여인들을 그린 글이다. 이걸 프랑스 대문호 장 폴 사르트르가 각색했고, 배삼식이 새로 썼다. 배삼식은 “극 중 노예 출신 여인들이 ‘우리는 지옥에서 지옥으로 건너갈 뿐’이라고 한탄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라며 “기본적으로 3·4조, 4·4조 등 판소리 율격에 맞춰 다시 쓰되, 코러스는 현대적인 어법으로 고쳤다”고 했다.
배삼식은 공연 중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등장할 때 관객들이 웃는 걸 보고 “짜릿했다”고 했다. 배삼식은 “판소리의 매력은 비속어, 사투리 등 ‘말맛’에 있는데, 영어 자막으론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의도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공감시킬지 고민을 거듭했다. 오랜 대화 끝에 ‘신을 다룬 옛 이야기를 지금 이 시대의 신과 엮어보자’는 결론을 냈다. 두 사람은 “그리스 시대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자가 신이라면 현대사회에선 권력자가 그렇다”며 “신들의 장난에 의해 파괴된 트로이 여인들의 삶을 부당한 권력으로 힘겨워하는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환하는 식으로 그리스 신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코리안 뮤지컬이 아니라 창극 그 자체로 관객들을 만나야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얘기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인기를 끈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해외 진출보다 한국 관객에게 창극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기획한 덕분에 한국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고, 해외 관객들이 그걸 매력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6년 한국 무대에 처음 올라 호평을 받은 뒤 해외로 무대를 넓혔다.
배 작가는 “판소리라는 한국 전통문화의 매력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스토리와 만나면 전 세계 누구든 좋아하는 공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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