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인생축제…지금, 에든버러

입력 2023-08-17 19:20   수정 2023-08-18 09:15

꿈 같은 여름 휴가지를 고민하는 공연 마니아라면 인생에 한 번쯤 영국 에든버러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보시라.

런던에서 북쪽으로 네 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달리면 영국 안 또 다른 나라, 스코틀랜드에 다다른다. 주도(主都) 에든버러는 인구가 50여만 명에 불과하지만 매년 8월이면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 도시 전체가 들썩인다. 세계 최대 공연 축제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 기간, 발 닿는 모든 곳은 극장이 되고 눈길 닿는 모든 곳엔 꿈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EIF의 출발은 ‘치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휩쓸고 간 직후 시민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던 그때. 영국 정부와 에든버러시는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건 음악을 비롯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서식스주의 글라인드본 오페라단 단장이었던 루돌프 빙이 첫 예술감독을 맡아 축제를 준비했다.

1년여의 준비를 거쳐 1947년 8월 최초의 EIF가 열렸다. 총 여덟 개 공연팀이 참가한 다소 소박한 규모였다. 당시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이 어셔홀에서 공연했는데, 이들의 음악은 전쟁의 아픔을 위로하고 시민에게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듬해 축제에선 16세기 스코틀랜드 시인이자 문장가인 데이비드 린지 경의 ‘3대 계급의 풍자’를 각색한 공연이 크게 흥행했다. 1950년부터 영국군 군악대도 축제에 참가하며 축제는 점차 영국과 유럽을 넘어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에든버러는 매년 8월 3주간 도시 전체가 ‘공연 중’이다. 올해로 76회를 맞은 EIF엔 전 세계 48개국에서 2000여 명의 아티스트가 방문해 총 295개의 공연을 선보인다. 클래식부터 오페라,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엄선된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들이 어셔홀과 페스티벌 극장, 에든버러 극장, 퀸스홀 등의 스케줄 표를 하루 종일 채운다. 여기에 EIF에 초청받지 못한 아티스트들이 거리를 비롯해 소극장에서 3000개 넘는 공연을 선보이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군악대 공연이 독립한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 등이 같은 기간 열린다.
누워서 듣는 교향곡, 사랑을 갈구하는 손짓…거장들의 매혹적인 유혹
2차대전 아픔 감쌌던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Where do we go from here?)

올해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의 큰 주제는 마틴 루서 킹이 암살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의 제목에서 가져 왔다.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은 축제와 시민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다. 니컬라 베네데티 EIF 예술감독은 “1947년 EIF가 처음 열릴 때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취지로 시작된 것처럼, 올해도 코로나19 이후 다시 한번 공동체 회복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시작해 오는 27일까지 3주간 열리는 EIF엔 총 295개에 달하는 공연이 펼쳐진다. 클래식 음악부터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별 주요 공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런던·베네수엘라 등 전 세계 오케스트라 모여
EIF를 찾는 클래식 공연팀은 총 22개 교향곡 콘서트와 19개 리사이틀을 선보인다. 그중 가장 독특한 공연 가운데 하나는 지난 8일 세계적 거장 지휘자 이반 피셔가 이끄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 인사이드 아웃’ 공연. 객석의 의자를 모두 치운 뒤 관객들이 편하게 앉거나 누울 수 있는 빈백으로 채우고, 그 사이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앉아서 연주하는 공연이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관객에게 오케스트라 속으로, 나아가 음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험을 주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일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의 교향곡 ‘투랑갈릴라’를 연주한다. 남미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네수엘라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오는 21, 24, 26일 공연한다. 그 밖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의 지난 11일 연주회는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美최고 무용팀의 안무·공동체 사랑 담은 작품도
축제에 참가한 무용팀 목록도 화려하다. 현대 무용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독일 출신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대표작 ‘봄의 제전’이 17~19일 에든버러 극장에서 공연된다. 이 공연은 1978년 EIF에서 영국 초연된 바 있다. 이번엔 아프리카 14개국 출신의 무용수 34명이 그의 안무를 재현한다.

미국 최고의 무용팀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도 23~25일 에든버러 페스티벌 시어터 무대에 선다. 팀 설립자인 앨빈 에일리가 안무를 만들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작품인 ‘계시(Revelations)’ ‘메모리아(Memoria)’ ‘더 리버(The River)’ 등을 선보인다.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 안무가 샤론 에얄이 가이 베하르와 함께 이끄는 ‘L-E-V 댄스 컴퍼니’는 2018년 EIF에 참가했던 ‘러브(LOVE)’ ‘러브 챕터2(Love Chaper2)’의 후속작인 ‘챕터3: 잔혹한 심장의 여행’을 지난 13~14일 선보여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9명의 댄서가 혼돈을 넘어 공동체의 형태로 사랑과 관계를 탐구해 나가는 작품이다.
한가득 음식 차려진 무대…호평 이어진 우리 창극
독특한 형식과 내용의 공연이 많다. 공연 연출가이자 퍼포머 제프 소벨은 관객 참여형 공연 ‘음식(Food)’을 축제 기간 내내 무대에 올린다. 가장 일상적 행위인 ‘식(食)’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연이다. 소벨이 차려 놓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관객들은 음식의 냄새와 맛, 촉각 등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소벨 특유의 유머 있는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있다.

지난 9~11일 공연한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도 축제의 하이라이트 중 한 꼭지를 장식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 전통 음악인 판소리로 표현한 독특한 공연이다. 이번 축제에서 이 공연은 영국 가디언 리뷰에서 별 다섯 개를 받기도 했다.
EIF 총괄 프로듀서 로이 럭스퍼드 올해 주인공은 '코리아'…한국의 창의성 기대해

EIF는 매년 한 국가를 선정해 해당 나라의 공연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국가 시즌을 마련한다. 코로나19 이전 프랑스, 지난해 호주에 이어 올해 주빈국은 바로 한국이다. ‘코리아 시즌’ 기획을 주도한 EIF 총괄 프로듀서 로이 럭스퍼드(사진)를 EIF 사무국이 꾸려진 에든버러 ‘더 허브(The Hub)’에서 만났다.

럭스퍼드는 “2013년 열린 EIF에서 한국 현대무용단 YMAP의 ‘마담 프리덤’ 공연과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전시를 본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가져왔다”며 “그동안 개별 공연팀을 초대해 오다가 올해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주영한국문화원 및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업해 ‘코리아 시즌’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코리아 시즌엔 국내 공연팀 총 5개가 초청됐다. KBS교향악단과 현악 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피아니스트 손열음, 국립창극단 등이다. 역대 최대 규모다. 럭스퍼드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로 구성하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며 “국립 단체가 해당 국가의 정체성을 잘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KBS교향악단과 국립창극단을 초청했고, 나머지는 한국의 젊고 유망하면서도 국제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아티스트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무용이나 극 공연 기획자 출신으로 EIF에 10년 전부터 합류한 럭스퍼드는 한국 공연에 대해 “현대적이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공연업계는 늘 새롭고 창의적인 콘텐츠를 찾습니다. 요즘 한국엔 창조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작품이 많아요.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 K팝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계 공연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가득 메운 프린지 페스티벌
초대받지 못해도 실망하지마…발길 닿는 곳이 무대!
에든버러 축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행사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기엔 주머니 사정이 가볍거나 좀 더 대중적인 공연을 보고 싶다면 바로 옆에서 열리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EFF)에 가면 된다.

EFF은 EIF와 함께 8월 3주간 에든버러 축제의 양대 축을 이룬다. 축제 기간에 에든버러 성부터 홀리루드 궁전을 잇는 ‘로열 마일’은 EFF 거리 공연팀과 그들을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하는 음악 공연부터 서커스, 코미디쇼 등 다양한 종류의 공연이 펼쳐진다. 이 기간에는 에든버러 곳곳의 대학 건물과 식당, 카페 등 수백 곳이 ‘임시 극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언저리, 주변부’라는 뜻의 ‘프린지’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EFF는 EIF에 공식 초청받지 못한 아티스트들이 모여 여는 공연 축제다. 1947년 EIF가 처음 열렸을 때 축제에 공식 초청받지 못한 8개 연극팀이 에든버러 시내 주변부 공터 등에 임시로 공연장을 만든 것에서 출발했다. 사전에 기획된 것도, 조직적인 체계도 없었지만 독특하고 참신한 공연으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본인들의 공연을 보여주려는 공연팀들의 발걸음이 늘기 시작했다. 1957년엔 협회가 구성돼 현재와 같은 공식 축제로 자리 잡았다. 클래식, 무용, 오페라, 연극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팀을 엄선해 초청하는 EIF와 달리 EFF는 누구나 신청만 하면 공연할 수 있다. 올해 EFF엔 세계 72개 국가에서 온 5만2000명의 아티스트가 3500여 개 공연을 선보인다.

누구나 공연할 수 있는 자유 등록 시스템. 단, 공연에 대한 홍보·마케팅도 각 공연팀이 자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3500개 공연 중 관객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포스터는 공연팀이 직접 준비해 붙여야 하고,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거리에서 홍보도 열심이다. 아티스트들이 분장하고 거리에 직접 나와 ‘맛보기 공연’을 보여주기도 하고, 특이한 복장과 행동으로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통에 축제 내내 에든버러 곳곳이 시끌벅적하다.

EFF의 공연은 EIF보다 다양하다. 아티스트의 국적도, 공연 장르도 천차만별. 소규모 연극부터 인형극, 마술쇼, 신체극, 서커스, 복합 공연까지 다양한 개성과 장르의 공연이 펼쳐진다. 티켓 수익이 곧장 공연팀 수익으로 이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관객을 끌기 위한 대중적인 공연이 많은 편이다. 번역이 필요 없어 다양한 국적의 관객이 즐길 수 있는 넌버벌(비언어적) 퍼포먼스도 자주 눈에 띈다.

EFF는 일반 관객도 많지만 세계 각국 공연·축제업계 종사자들이 찾는 일종의 ‘마켓’ 기능도 한다. 이곳에서 좋은 공연을 발견해 계약을 추진하는 식이다. 공연팀에는 해외에 진출할 기회의 장이 되는 셈이다. EFF에서 시작된 ‘프린지’는 다른 지역으로 퍼져 하나의 현상이 됐다. 1967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도 ‘오프(off)’란 명칭으로, 공식 초청 작품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공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 캐나다, 홍콩, 태국 등에서 각종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 연출가 조예은
"트렁크에 담긴 작은 무대로 전세계 관객들 사로잡았죠"

“‘트렁크’에 담아서 이동할 수 있는 세트로 무대를 세울 수 있는 연극을 만들어요. 프린지에 딱 맞는 콘셉트 아닌가요? (웃음)”

영국 에든버러 서머홀의 작은 강의실만한 크기의 소극장. 올해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EFF)을 찾은 국내 공연팀 중 하나인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는 이곳에서 축제 기간 3주 동안 매일 오후 2~3시에 연극 ‘블럽 블럽(Blub Blub)’을 공연한다. 출연 배우는 단 두 명에 무대 장치는 스크린에 무대 배경을 비추는 작은 영사기가 전부인 소박한 무대지만, 좁은 소극장 객석이 가득 차는 ‘인기 공연’이다.

이 팀을 만든 조예은 작가 겸 연출가(사진)를 서머홀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수조 속에 같이 살다가 탈출을 꿈꾸는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인데, 음악극과 인형극·신체극 등 다양한 장르적 특성을 가진 연극이에요. 지난해 주영한국문화원 기획으로 처음 EFF에 참여했다가 올해는 극장에서 먼저 초청 제안을 받아 또 오게 됐죠.”

이번이 두 번째 축제 참여지만 벌써 마니아층이 생겼다.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는 지난해 EFF에서 ‘메리, 크리스, 마쓰’를 공연해 ‘별 다섯 개’ 리뷰를 받기도 했고, 현지 공연 전문 잡지사에서 ‘프린지에서 꼭 봐야 할 공연 10개' 안에 들기도 했다. 조씨는 “공원에서 공연 홍보용 전단을 나눠주다가 작년에 우리 공연이 EFF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는 관객을 만나 신기했다”며 “얼마 전 홍콩의 공연 관계자가 와서 개막 공연을 보고 ‘잘 봤다’며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청만 하면 올 수 있는 EFF라지만 막상 이곳에 오기가 쉽지 않다. 항공비에 한 달간 숙식비, 공연장 대관비 등을 고려하면 수천만원 이상이 든다. 조씨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관광공사 등 국내 기관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식비를 비롯한 체류비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말했다.

매일 공연에 알바까지 하느라 고단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전 세계에서 온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 덕분. 조씨는 “EFF는 공연마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권의 관객들이 보이는 색다른 반응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꼭 화려한 무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국가의 관객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에든버러=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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