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119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가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다. 자유시장에서 가격은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오르고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늘어 균형을 이룬다. 이런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있다. 국내 의약품 시장의 86%를 차지하며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 얘기다.
전문의약품 가격은 어떻게 정할까? 정부가 정하는 기준과 절차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시장경제의 반대다. 수요는 누가 정할까? 수요자인 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어떤 약을 쓸지 결정한다. 의사가 선택하면 사용량이 증가한다. 그러면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을 명분으로 가격을 깎는다. 일반 물품이라면 가격이 올라야 한다. 이 역시 시장경제 원리와 정반대다. 한번 인하된 약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물가는 주기적으로 오르지만 원가나 환율 상승을 반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부는 약가 일괄인하, 사용량이 늘어난 의약품의 가격 인하(사용량약가 연동제도), 약값의 적정성을 주기적으로 따진 후 인하(기등재약 재평가) 등 여러 명목으로 의약품 가격을 낮췄거나 낮추려 한다. 1999년 실거래가제도 도입 이후 지금까지 깎인 약값을 다 합쳐보면 어림잡아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연구개발 비용이 부족해도, 글로벌 시장 공략 인프라 구축에 어려움을 겪어도 약가 정책에 묵묵히 협조해온 산업계는 칭찬받기는커녕 추가 가격 인하 정책이 나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냉가슴을 앓고 있다.
정부는 제약바이오를 제2의 반도체로 키워 국가 미래 먹거리로 삼겠다고 한다. 신약 개발에 최소 10년의 시간, 약 1조원의 돈이 든다. 만일 정부가 그간 깎은 약값만큼, 아니 그 10분의 1이라도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1조원 이상 벌어들이는 ‘블록버스터 신약’ 몇 개는 보유하고 있지 않을까. 국민은 혁신 신약으로 치료받고, 산업이 성장해 정부의 세금 수입도 크게 늘어나고.
약가가 최고의 산업 정책이라는 말이 있다. 정책의 영향력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2018년 허가받은 국내 개발 신약 30호(HK이노엔 케이캡)에 대해 정부가 글로벌 진출 지원을 위한 약가 우대 지침을 적용해줘 지금은 1조원 매출 후보로 급성장했다. 정부 약가 정책이 어떻게 산업의 성장을 도울 수 있을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새는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은 정부의 산업 육성 정책과 약가 정책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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