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9일 공개한 2024년 예산안엔 윤석열 대통령이 그동안 강조했던 핵심 사안들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평가다. 역대 최대폭의 생계급여 인상을 비롯해 노인 일자리 100만개 확충, 바이오·AI(인공지능) 등 첨단산업 육성, 군 주거·병영여건 개선 등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화도 확실히 했다. 매년 8~9%대로 예산 총지출을 늘렸던 이전 정부와 달리 2년 연속 긴축 재정 기조를 이어갔다. 가시적 성과 창출에 미흡했다는 이유로 연구개발(R&D) 예산을 전년 대비 16.6% 삭감한 데 이어 지역화폐 예산은 올해에 이어 전액 삭감했다.
예산 삭감 과정에서 부처 간 갈등 등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번 예산안 편성 과정에선 대통령실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당초 계획 대비 국가 R&D(연구·개발) 예산을 더 줄이기로 하면서 증가율을 더욱 낮출 수 있었다는 것이 기재부 설명이다. 국가 R&D 사업 예산은 올해보다 3조4000억원(13.9%) 삭감한 21조5000억원으로 편성됐다.
내년도 예산 총지출 증가율이 2.8%로 편성된 것도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을 감안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재부는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역대 최저 증가율이라고 소개했다. 2005년 이래 가장 낮았던 해는 2016년으로, 2.9%였다.
역대 최저 증가율이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한 막판의 시도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증가율을 미리 정해놓고 예산을 수립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숫자가 가진 상징성도 일부 의식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15억원에 그쳤던 최중증 발달장애인 돌봄 예산은 내년 717억원으로 늘어난다. 당초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이 사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데 비해 수혜자 수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기재부는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판단에 따라 밀어붙였다.
보고받은 윤 대통령은 “이런 사업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칭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여 필요한 곳에 집중한 것에 대해서도 담당 공무원들을 극찬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재부가 국토교통부에 제안했던 이 아이디어는 한 달 가까이 논의됐지만, 내년 예산안에 담기지는 않았다. 재정 투입 대비 수혜자가 적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또 공동 지분일 경우 관리 주체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등 제도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재부 관계자는 “저출산 해결책으로 주택 마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주택 구입 부담을 반으로 줄이면 어떨까 하는 개념 정도로 논의했다”며 “많은 국민에게 제공하기 어렵고 행정 비용도 적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결론 내렸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도 R&D 사업 예산을 공개했다. 엠바고로 설정된 일부 내용이 다른 부처의 발표로 미리 알려진 것이다. 제4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 회의가 이날 열렸기 때문에 공개가 불가피했다는 것이 과기정통부와 기재부의 설명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도 해명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정부 관계자들은 극소수다. 실제로 예산안 관련 브리핑 일정은 대통령실과 다른 부처에도 미리 공유됐다. 그럼에도 R&D 삭감에 대한 의미를 강조한 대통령실의 지시에 따라 과기정통부가 발표를 강행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산안 엠바고 해제 시점도 논란이 됐다. 당초 설정된 엠바고 해제 시점은 29일 국무회의가 열리는 오전 10시였다. 하지만 전날인 지난 28일 엠바고 해제 시점이 갑자기 오전 11시로 한 시간 늦어졌다. 이 역시 대통령실의 강력한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민/박상용/황정환/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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