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아내와 동네 카페에 책을 들고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밤공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레몬처럼 선선했다. 늪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소택지의 웃자란 풀숲에서 청아하게 우는 풀벌레 울음소리는 데시벨이 높았다.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저것은 계절의 순환을 찬양하는 풀벌레의 합창이고 풀벌레들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재능기부 한 거라고, 아내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걸었다.
풀벌레 울음소리는 처서를 지나면서 속절없이 저무는 여름의 쇠잔함과 쓸쓸함을 품고 있었다. 폭주하던 여름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이면서, 새벽녘 창으로 밀려드는 찬 기운이 선득해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이불을 끌어다 덮곤 한다. 올여름에 바다를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덧없이 떠나보내는 여름에 대한 가느다란 비애가 스며들며 가슴이 서늘해진다.
바닷물에 몸을 담근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헤집어보니 꽤 오래됐다. 열일곱 살에 바다를 처음 봤다. 고추냉이에 찍은 생선 날것을 혀에 얹어 맛본 것도 첫 경험이었다. 나는 문학 열병에 빠져 고등학교 학기 중에 가출해서 동해안 죽변이라는 포구를 찾아갔다.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생선 비린내 진동하는 어판장과 정박한 채 잔물결에 흔들리는 오징어잡이 배들, 철 지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과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오징어잡이 배들은 어두워진 뒤 먼 바다로 나가 조명을 밝히고, 밤샘 조업을 하고 새벽이면 만선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한 달쯤 머물렀는데, 그새 태풍이 작은 포구를 휩쓸었다. 바다는 거대한 짐승처럼 제 몸을 뒤채며 으르렁거리고, 강풍에 극장 간판이 날아가고 가로수는 뿌리가 뽑힌 채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방파제에 부딪혀 포말을 날리며 포효하는 산만한 파도에 감탄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나는 허먼 멜빌의 해양소설 <모비딕>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지구를 뒤덮고 압도하는 저 바다, 오직 자신의 자비, 자신의 힘만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저 바다, 인간 따위는 언제라도 모욕하고 살해해버릴 저 바다, 서로를 잡아먹으며 천지개벽 아래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는 저 바다!
날이 밝자 파란 하늘과 함께 바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온순해졌다. 나는 바다의 마술적 변신에 놀라고 내 안의 숨은 비겁과 위악, 허약함을 봐 버린 듯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죽변에서 집으로 돌아와 당장 실업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시립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책을 읽었다.
30대 후반, 제주도 바닷가에 홀로 나가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내 안의 열망들이 꺾인 채 낙담하고 망연자실하던 시절, 수평선을 바라보는 게 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내 이마에 걸리는 수평선은 바다의 끝 간 데에 가로누운 일획이다. 그것은 보는 자와 바라보임의 대상 사이 긴장, 즉 시지각적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바다의 질감과 색과 깊이를 삼킨 채 침묵을 지키는 수평선은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의무와 합목적성의 현실과 피안의 경계를 일획으로 가로지른다.
푸른 파도를 가르며 먼바다 쪽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해변 쪽으로 돌아온다. 헤엄을 치다가 서늘해진 몸으로 물방울을 떨구며 물 밖으로 나오면 백사장에는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들끓고 있다. 땡볕 아래 몸을 눕힌 채 일광욕을 하고 나면 마른 팔뚝에 소금 알갱이가 남는다. 팔다리에 노곤함을 느끼며 일어설 때 바다에는 젊은이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로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바다의 부재는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세계가 바다라면 나는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다. 바다와 첫 교유를 한 뒤 나는 여러 바다를 떠돌았다. 제주도에 입도할 때마다 찾던 고운 협재 바다, 속초항에서 출항해 이튿날 새벽에 닿은 금강산 앞바다, 그리스 크레타섬을 감싼 상냥한 지중해, 산토리니섬의 아름다운 일몰을 수줍게 펼쳐 보여주던 바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귀환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며 떠돌던 악마의 바다, 쿠바 아바나 해안에 펼쳐진 눈부시게 푸른 바다!
내가 폴 발레리가 제 고향 세트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썼다는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올바른 자 정오가 여기에서 불꽃을 짠다”라는 긴 시 ‘해변의 묘지’를 젊은 시절 줄줄 외웠던 것은 바다를 향한 연모 때문이었으리라. 바다들은 비루한 삶이 이뤄지는 낡은 세계와 저 너머의 이상향 사이에서 영원히 출렁였다. 여름은 끝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바람이 인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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