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네덜란드는 ‘세계의 마차’로 불렸다. 물류의 70%를 네덜란드 상선이 도맡았는데 이 시절 뱃사람들의 명성이 큰 역할을 했다. 1597년 네덜란드 상선이 북극해 빙하에 갇힌 일이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얼음이 녹을 때까지 반년간 바다사자를 잡아먹으며 버텼다. 선장과 선원 절반이 숨져서야 겨우 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상선의 화물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던 것. 고객의 화물, 먹거리에 손대지 말라는 선장의 유언을 선원들은 지켜냈다. 이 선장의 이름이 ‘빌럼 바렌츠’다. 위대한 상도의, 직업인의 명예를 기려 후대인들은 이 북극 바다를 ‘바렌츠해’로 명명했다. 근로자의 신용을 지킨 옛 뱃사람들의 삶 앞에 숙연해진다.
자문하고 자답해본다. 교사에게 학교는 그저 밥벌이하는 업장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선생들 한 명 한 명이 본인 삶을 어찌 규정하는가에 달렸다.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 일각이 교사를 하대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선생을 향한 높은 기대와 도덕적 떠받듦이 공존한다는 것, 여전히 교육에서 시대의 희망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뱃사람들의 직업윤리와는 비할 수 없는 드높은 덕, 나는 그게 ‘분필을 놓지 않음’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 때 피난촌의 천막학교를 떠올려보라. 우리 선조들은 그나마 덜 찢어진 텐트를 골라 학교로 삼았다. 거기서 포연을 맡아가며 ‘가나다라’ 가르친 게 우리 선배들이다. 종이도 없어 매일 군수품 박스를 뜯어다가 수업에 썼다. 그 종잇장들이 아이들의 미래였고 세상의 보석이요 희망이었다. 전쟁 중에도 교실은 문 닫지 않았다. 아니, 닫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학교를 멈추려 한다는 얘길 듣는다. 9월 4일이 거사(?)일이라고. 집단으로 병가, 연가를 내고 쟁의에 나선다는 흉흉한 말들. 쉽게 말해 파업할 방법을 찾고 찾다가 아프다고 거짓 보고를 하자는 것이다. 참으로 딱하다.
전에 내 제자가 그랬더랬다. 대뜸 집에 가겠다길래 안 된다고 붙잡으니 복도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이젠 목 아프니까 병원 가야겠다고 떼쓰던 아이. 만일 교사들이 끝끝내 거짓말을 동원해 길 위에 서겠다면, 앞으로 제자들이 조퇴시켜달라고 거짓부렁해도 다 들어주시라. 사는 만큼 가르치는 거다. 애초에 우리는 파업권이 없음을 다 알고서 임용 서류에 사인했다. 아닌가? 인제 와서 아프다고 병가, 연가 내는 남루한 행동을 우린 ‘편법’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회적 제스처든 목적의 정당성은 수단의 정당함으로 증명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웹툰 작가 주모씨와 다를 바 없다. 주씨 부부의 불법 녹취도 나름의 대의는 있었다. 우리가 교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불법 쟁의에 나서면, ‘대의’를 위한 불법 녹음도 다 옹호되는 것이다. 아동 인권이나 교사 인권이나 숭고한 건 매한가지니까.
유례없이 난폭한 학부모들의 증가세 이유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한 자녀 가정이 대세인지라 학부모가 극성스럽다는 말, 어린 시절 학교생활의 괴로움을 기억하는 어른들의 백래시(backlash)라는 평, 민선 교육감들이 거대 유권자 집단인 학부모들에게 포퓰리즘적으로 영합해서라는 입장, 특정 교원·인권단체가 기존 교사들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본인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학부모 민원을 사실상 장려했다는 의혹, 법률가가 대거 사법 시장에 쏟아져 나와 학교가 생계형 소송의 블루오션이 됐다는 평까지. 모르겠다. 이 비극을 훗날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 내릴는지.
분명한 것은 선 넘는 사람들에게 선 넘는 식으로 대처하면 우리도 동급이 된다는 점이다. 교사의 존엄은 궁극적으로 ‘분필을 놓지 않음’에 있다. 거짓말로 조퇴를 요구하는 제자를 엄히 꾸짖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 세상 앞에 거짓말하지 않음에 있다. 가르치는 대로 친히 살 때 세상은 교육자를 수긍하고 그 권위에 고개 숙인다. 집단 병가는 운운하지 말자.
돌이켜보건대 우리 선배들은 포연 가득한 전쟁터에서도 천막교실을 지켜냈다. 네덜란드 뱃사람들은 빙하에 갇혀 죽어가면서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그 존엄의 기억을 이제 우리 이야기로 바꿔 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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