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6년제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각박한 수련 생활을 버틴다. 이후엔 대학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거나 개원의로 살아간다. 서울대 의대 출신들로 구성된 동문모임 ‘경의지회’에는 의사라는 안정된 길을 뒤로하고, 예측 불가능한 병원 밖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창업가들이 모여 있다. 스스로를 ‘경계에 선 의사(경의)’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4050세대인 90학번대는 경의지회 창업가를 지탱하는 경력자 그룹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초대 가정의학과장을 지낸 김주영 바이오뉴트리온 대표(92학번)는 2020년 창업을 선택하고 지방간 전문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해 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다. 최원우 큐티스바이오 대표(91학번)는 서울 압구정동 한복판에 피부과를 개원해 15년을 운영했다. 최 대표는 “어느 순간 의사로서의 역량이 좁게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미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소재를 만들어내는 연구를 하다가 시장 가능성을 내다봤다”고 말했다. 2020년 창업에 뛰어든 최 대표는 프랑스 로레알그룹, 카카오헬스케어와 협업 중이다. 산부인과 전문의 이혜준 카이헬스 대표(98학번)는 인공지능(AI)를 활용해 우수 배아 선별 확률을 65%까지 끌어올린 난임 치료 솔루션으로 국내와 유럽 시장을 조준하고 있다.
10학번 이후 후배들도 경의지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선배 창업가들과 자주 교류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편입한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는 3학년이던 2020년 회사를 창업했다. 고 대표는 치매를 예방하는 인지 기능 관리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이혜성 에어스메디컬 대표는 4학년이던 2019년 창업했다.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촬영 시간을 AI로 단축해 지난해 253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했다.
이 모임 내부에서도 ‘의사 창업가’의 역할 확대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손지웅 경의지회 회장(LG화학 사장)은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는 의사들이 진료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창업으로 더 많은 이들의 건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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