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관계당국에 ‘물가 인상의 주범’으로 찍히는 게 두려워 떠밀리듯 결정했을 것이란 게 업계의 중론이다. 지난 7월 말 낙농가와 우유업체 간 원유(原乳) 가격 협상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속내는 이런 심증을 확신으로 바꿨다. 정부는 우유값이 L당 3000원을 돌파할 공산이 커지자 느닷없이 “우유값에서 유통마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며 유통사를 저격했다.
정부의 이런 대응은 연원이 긴 ‘유통사는 절대갑(甲)’이란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제조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통사들인 만큼 일정 부분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이는 10년이 넘었는데도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대규모유통업법과 궤를 같이한다. 2012년 이 법이 시행에 들어갈 당시는 대형마트 등 오프라인 유통사가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표적 탁상 입법”이란 경제계의 비판이 깡그리 무시된 채 개선 조짐조차 안 보이는 건 유통사를 악마화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피해 가려는 정부·정치권의 꼼수 탓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전통시장 활성화를 가로막는 존재로 비쳤던 마트는 ‘온라인 공룡’들에 밀려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쇼핑족의 주류도 주말마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던 가족에서 편의점을 찾아 그때그때 필요한 걸 사는 ‘혼밥족’으로 바뀌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경쟁법학회 세미나를 다녀왔다. 이 자리에서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규모유통업법에 관해 “장식만 달다 보니 결국 맞지 않는 옷이 됐다”고 했다. 이어 “정부와 국회가 문제는 놔두고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계속 조항만 추가했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의 비유처럼 우리 유통업체들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10년이 넘도록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부·정치권의 갖은 딴지 걸기를 견뎌내며 장바구니 물가 지키기 도우미를 자처한 결과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경쟁력이다. 소비자들도 이런 실상을 대부분 안다. 맞지 않는 옷은 분리수거함에 갖다 버릴 때가 됐다. ‘유통사=절대갑’이란 무의식을 끊어내는 건 정부와 정치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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