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5), 피아니스트 정명훈(70), 첼리스트 지안 왕(55)이 악기 위에 손을 올린 채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자 2000여 명의 청중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뜨거운 환호와 박수 세례는 두 번의 앙코르곡을 들은 뒤에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흰머리가 성성한 노부부는 감정에 북받친 듯 연신 눈물을 훔쳤고, 중년의 신사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럴 만한 연주였다. 정명훈이 피아니스트로, 정경화가 바이올리니스트로 함께한 것은 2011년 어머니 이원숙 여사를 기리는 추모 음악회 이후 12년 만이었다. 사실상 연주 활동을 중단한 정명화(79)의 빈자리는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지안 왕이 채웠다.
오후 7시30분. 정명훈과 지안 왕이 들려준 첫 곡은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였다. 정명훈은 시작부터 건반을 힘줘 누르기보다 손가락 자체의 무게를 한 음 한 음 떨어뜨리는 듯한 무심한 타건으로 드뷔시 특유의 신비로운 음색을 펼쳐냈다. 담백하면서도 깨끗한 피아노의 색채와 매 순간 활을 강하게 밀면서 열정을 토해내는 지안 왕의 첼로 음향은 빠르게 소리의 균형을 찾아가면서 다채로운 굴곡을 만들어냈다.
이후 정명훈과 정경화가 함께 등장하자 객석에선 마치 공연 피날레를 연상케 하는 열렬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치밀하게 설계된 풍부한 화성과 장엄하면서도 격정적인 악상으로 채워진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정경화는 ‘바이올린 여제(女帝)의 귀환’을 알리듯 특유의 날카로운 색채와 섬세한 보잉(활 긋기)으로 강렬한 서정을 펼쳐냈다. 활을 현에 밀착한 채 아주 빠르게 내려치면서 정열적인 화음을 쏟아내다가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을 줄인 채 애수에 찬 음색을 뽑아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70년을 함께한 남매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억지로 꿰맞춘 듯한 대목 하나 없이 색채부터 리듬 표현, 음향적 질감까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정명훈은 연신 정경화의 몸짓을 살피며 작게 숨을 내쉬는 타이밍,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음의 세기 등을 예민하게 조절해냈다.
마지막 작품은 차이콥스키가 그의 음악적 동반자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 트리오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세 연주자가 각자의 선율을 긴밀히 주고받으며 만들어낸 응축된 에너지와 풍성한 색채, 강한 추진력, 역동적인 입체감은 전체 악곡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작품 중간에 삽입된 열두 개의 변주곡에선 섬세한 터치로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풍부한 정감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절규하는 듯한 바이올린의 강렬한 악상 표현과 짙은 우수를 쏟아내는 묵직한 첼로의 울림으로 이뤄낸 음향적 대비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점차 타건의 세기를 줄이면서 죽음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담담히 속삭이는 피아노를 따라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연주는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음정이 흔들리거나 도입부를 놓치는 등의 기교적 실수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깊은 음악적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소리에 완전히 스며들어 청중을 압도한 이들의 음악은 오케스트라의 광활한 에너지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었다. ‘전설들의 찬란한 기록.’ 이보다 더 정확히 이들의 연주를 표현할 말이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