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가 낳고, 루스벨트가 키운 '파나마 햇'

입력 2023-09-14 18:01   수정 2023-09-15 02:24

여름도 다 지났는데 무슨 모자 얘기를? 이번 칼럼을 준비하는 필자에게 지인이 던진 의문이다. 그러나 곧 우리를 엄습해올 가을볕(여름을 막 지낸 모두에게 우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은 꼿꼿하고 시퍼렇게 억센 여름 벼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초록으로 싱그럽던 고추의 붉음을 더욱 진하고 농밀하게, 매운맛의 독을 키운다. 그렇게 가을볕은 우리들의 기미와 검버섯 대량 생산의 원천인 바, 중년의 위기를 온몸으로 체험 중인 필자는 이 매서운 가을볕으로부터 독자들을 보호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안고 이 칼럼을 준비한다. 우선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파나마 모자’는 왜 파나마 모자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까? 파나마가 원산지라서? 아니면 파나마가 관련된 영화에 등장해 엄청난 흥행이라도 한 것일까?
골드러시·파나마 운하가 낳고, 루스벨트가 알렸다
우리는 ‘파나마’라는 이름을 들으면 백이면 백 ‘파나마 운하’를 떠올린다. 파나마는 남미의 중간쯤에 있다. 파나마 운하는 커다란 북미와 남미의 대륙을 아슬아슬 개미허리처럼 이어주는 긴 운하다. 파나마 지형은 먼 뱃길을 돌고 돌아 물자를 나르는 이들에겐 운임과 운송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매력적인 운하 사업지로 눈에 먼저 띄었을 것이다. 그렇게 파나마 운하는 프랑스 기술과 유대 자본으로 1880년대에 착공됐으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로 완공됐다. 제1차 대전이 시작되던 그해, 1914년 8월 15일 겨우 완성됐다.

수많은 스캔들로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들을 셀 수 없이 감옥으로 보냈고, 말라리아와 황열병은 물론 추락과 각종 사고로 2만7500여 명 노동자의 생명을 희생한 채 완공된 파나마 운하. 놀랍게도 단지 80여㎞의 운하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우회해야 했던 2만2500㎞의 긴 항로를 단 9500㎞로 단축했다. 이 신박한 토목건축물은 세계인의 관심사였고, 공사 과정에 엮인 몇 가지 정치·경제적 스캔들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보다 조금 이른 1850년대 미국 서부에서 많은 사금이 발견되면서 이른바 골드러시 현상이 있었다. 금을 캘 때 쓸 모자로 통기성이 좋고 내구성도 뛰어난 이 모자가 이미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 당시에는 파나마가 남미 제품의 미국 수출 통로였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미 서부로 향했던 남미의 노동자들도 파나마를 지나며 이 모자를 들고 갔다. 이미 파나마에서 온 모자로 알음알음 알려지던 중이었다. 시간이 흘러 1907년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국가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 줄 파나마 운하 공사 현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방문 당시 쓰고 있던 멋진 하얀 모자가 전 세계 뉴스로 타전됐다. 파나마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았지만 전 인류에게 ‘파나마 모자’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것이다.
잉카인의 기술력…16세기에 처음 등장
그렇다면 이 모자는 어디서 어떻게 제작된 것일까? 이 모자의 기원은 잉카인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마추픽추로 알려진 신비의 공중 도시를 건설한 잉카인들의 섬세한 기술력은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질기고 튼튼한 이 모자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파나마에서 멀지 않은 이웃 나라 에콰도르에서 최고급 제품들이 양산되고 있다. 에콰도르 북서쪽 해안가의 습지에서 생산되는 토킬라(toquilla)라고 불리는 야자과의 줄기식물을 이용해 잉카인들은 이미 13세기부터 무더운 남미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우리가 쓰고 있는 형태는 16세기께 갖춰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파나마 모자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모자의 형태나 세부적인 디자인의 차이가 아닌, 어떤 소재로 어떤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에콰도르의 꼼꼼한 기술자들이 원료 잎을 실처럼 가늘게 손수 찢고 촘촘하게 짜 2.5㎠당 1200개의 섬유를 엮어 흡사 모시처럼 섬세하게 만드는 게 포인트다. 이 모자의 제조 방법은 2012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으니 형태가 비슷한 저렴한 다른 모자들과 파나마 모자를 구별할 때는 가격뿐만 아니라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를 꼭 확인해보는 게 좋다.
유네스코 유산이 된 모자, 셀럽 홀리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사연과 얽힌 파나마 모자는 일찍이 험프리 보가트, 게리 쿠퍼, 살바도르 달리나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셀럽은 물론 윈스턴 처칠과 해리 트루먼 등 정치인, 오드리 헵번과 그레타 가르보 같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스타일에도 일조했다. 조니 뎁 같은 비교적 최근 스타들이 자신만의 개성 있는 스타일로 명성을 쌓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으로는 파나마 모자 최고 멋쟁이로 1940년대 초반 태어난 두 명을 꼽고 싶다. 영정 사진에서 싱긋한 미소와 함께 파나마 모자를 쓰고 계시던 나의 아버지, 그리고 롤링스톤스의 간판 믹 재거다.

이제 슬슬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마룬파이브의 ‘무브스 라이크 재거(Moves like Jagger)’의 휘파람 전주가 흘러나올 때, 어깨를 들썩거리며 파나마 모자를 살짝 들었다 놓는 건 어떨까. 이보다 더 이상 근사할 수 없었던 믹 재거의 몸짓으로, 아버지의 싱긋한 미소를 떠올리며 파나마 모자를 써볼 테다. 함께 써 보실라우? 레츠 웨어 라이크 재거(Let’s wear like Jagger!)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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