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요, 어머니.” “안 된다. 뜸 들 때까지 기다리자.” 뜸이 들면 어머니는 나무 주걱으로 밥을 퍼서 그릇에 소복하니 담는다. 그 순간의 기적을 아는가. 선녀 옷자락 같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침이 저절로 나온다. 물이 많으면 진밥이요 물이 적으면 된밥이다. 진밥과 된밥 사이, 뭉쳐진 쌀알의 탱글탱글한 찰기가 입안에서 상쾌한 탄력으로 감돌 때, 그 쾌미의 감각이 ‘고슬고슬하다’라는 형용사다. 물과 불의 화합을 배우고 기다림의 기적을 배우는 시간. 최상의 행복이 밥상머리에서 펼쳐진다.
가을이다. 나는 가을 햇살에서 고슬고슬한 감각을 느낀다. 먹고 싶다, 저 가을 햇살! 화합과 기다림은 햇살밥과 햅쌀밥도 뒤섞는다. 세상은 내 안에서 풍요롭다. 황금 들판을 보는 마음도 비슷하다. 시골 농부의 말이 떠오른다. “가을 햇살에 메뚜기 마빡도 따끈하게 익어가지러.” 사투리와 비속어가 오히려 정겹다. 내 몸의 감각을 대상과 융합시키는 체감의 언어다. 비정하지 않고 다정하다. 나는 늘 다정하고 싶다.
가을이다. 고개 들어 하늘 바라보다가 문득 내 몸을 돌아본다.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머리털은 자꾸 빠진다. 푸른 하늘은 변함없는데 지상의 청춘은 이렇게 가는구나! 내 몸도 더운 김의 밥처럼 고슬고슬한 시절이 있었을 테지. 실내의 삶은 안온하지만 우리를 안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끔은 하늘과 산과 들과 바다를 보고 싶다. 그게 몸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몸은 동사의 전진기지다. 본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먹는다, 걷는다, 만진다, 달린다…. 동사의 모든 종목이 알고 보면 몸의 향연이다. 아직은 잔치를 끝낼 때가 아니다.
가을 잔치를 새로 시작하자. 시인 박두진은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고 노래했다. 하늘과 호수와 사람이 하나 되는 경지를 체험해보자. 벗이여, 실내족의 주민증 대신 실외족의 여권을 발급받자. 밖으로 나가자, 저 햇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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