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머리에 토슈즈를 신은 '특별한 줄리엣'

입력 2023-09-18 18:36   수정 2023-09-19 00:33


소년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했기에 꿈은 자연스레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였다. 목포예고에서 발레를 배웠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들어갔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는 세상의 편견을 막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곳에서 들은 첫마디는 절망적이었다. “너, 그 여성성 버려.”

결국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 이태원 지하 클럽으로 숨어들어갔다. ‘호모 ××’라고 손가락질받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그는 가슴에 패드를 넣고, 화려한 가발과 진한 화장으로 본인을 가리고 춤을 췄다.

국내에서 유명한 드래그 아티스트(과장된 분장과 퍼포먼스 등으로 고정된 성 관념을 무너뜨리는 예술가) 가운데 하나인 모어 모지민(45·사진)이 특별한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를 올린다. 이달 20~23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앤드 모어(and more)’를 통해서다. 그는 삭발 머리에 토슈즈를 신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모어의 줄리엣’을 무대에 불러낸다. 공연 준비에 한창인 모지민을 18일 LG아트센터 연습실에서 만났다.
드래그 아티스트가 표현하는 줄리엣
모지민은 2019년 미국 뉴욕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올린 뮤지컬 ‘13 후르츠케이크’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다. 2020년에는 드래그 아티스트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연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는 지난해 대종상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다양한 무대에서 춤실력을 뽐내왔지만 모지민에게 이번 공연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통 무용 공연에서 주역 무용수로 처음 서는 공연이어서다. 모지민은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발레는 나의 영원한 꿈”이라며 “여러 무대에서 춤추면서도 제대로 발레를 해본 적이 없어 늘 목말랐던 기회”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낯설게 비튼 일종의 무용극이다. LG아트센터가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해 보겠다는 취지로 기획한 ‘크리에이터스 박스’ 작품 가운데 하나다. 러닝타임 70분 동안 대사 없이 발레와 현대 무용 등이 섞인 몸짓으로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낸다. 모지민은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줄리엣을 연기한다.

모지민은 작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연출과 안무 등을 담당했다. 그는 “내 남편과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소수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서도 “정치적 주장을 하거나 특정 주장을 전달한다기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대중적인 스토리를 아름다운 몸짓으로 풀어내는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줄리엣의 죽음을 애도할 때 풍선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사용하는 등 독특하고 신선한 표현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술병 날아왔던 이태원 드래그
2000년부터 시작한 드래그는 모지민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이태원 클럽에서 공연하다 보면 취객으로부터 술병과 담배꽁초 등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그곳에서 20년 넘게 쇼를 이어갔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더 버티기 힘들었죠. 하지만 제가 클래식 발레만 계속했다면 ‘모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이번 작품 같은 공연도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돌이켜보면 제 모든 경험이 저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만들 수 있는 원천이 됐습니다.”

성소수자 관객 등으로부터 ‘공연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응원이 된다고 했다. “지금도 많은 퀴어(성소수자) 예술가가 본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활동해요. 저는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공연을 통해 저와 같은 사람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알고,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리고 싶습니다. ‘모어 모지민’만의 장르와 방식으로요.”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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