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경기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30년간 공들여온 안내견 사업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안내견이 될 강아지를 돌봐주는 자원봉사자 ‘퍼피워커’들과 함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홍 전 관장이 외부 공식 행사에 참석한 것은 2017년 관장직을 내려놓은 이후 처음이다.
이날 행사엔 정든 안내견과의 이별을 앞둔 퍼피워커들이 단상에 올랐다. 강아지를 생후 7주부터 1년간 자신의 집에서 돌봐준 뒤 시각장애인 파트너에게 보내는 입양을 앞두고서다. 단상은 곧바로 ‘눈물바다’가 됐다. 한 퍼피워커는 “목욕하기 싫다고 떼쓰던, 철부지 딸 같던 ‘미지’가 안내견 시험에 합격했다니 너무 자랑스럽다”며 소감문을 읽다가 결국 눈물을 훔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 회장과 홍 전 관장의 눈시울도 금세 붉어졌다.
단상에 오른 시각장애인 김영신 씨는 점자로 미리 출력해온 소감문을 손으로 짚었다.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안내견 미지와 함께라면 앞이 안 보이는 저도 아기랑 안전하게 외출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지 덕분에 엄마로서 진정한 자립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에선 안내견 사업에 애착이 컸던 이건희 선대회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도 조명됐다. 홍 전 관장은 김 의원과 대화를 나누며 “회장님이 생전에 굉장히 노력한 사업이라 직접 보셨으면 더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김 의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조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조이는 김 의원의 안내견이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30년 전 안내견 학교를 세울 당시엔 안내견에 대한 개념 자체도 없을 때였다. 삼성이 개를 기르는 데 돈을 쓴다고 하자 일각에선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온갖 시비와 비판에도 고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특유의 뚝심으로 안내견 사업을 이끌었다. 미발간된 그의 에세이 ‘작은 것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지금은 현실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거나, 바보라는 비난을 듣지만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인정하게 될 것”이라며 “안내견 사업이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
고인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그의 말대로 지난 30년 새 한국 사회 제도와 인식의 변화는 컸다. 1995년 이전까지 금지됐던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비행기 탑승이 허용됐다. 삼성 직원들이 해외 사례와 국제법 자료를 뒤져 항공사를 직접 설득한 결과였다. 1996년엔 초등학교 교과서에 안내견에 대한 설명도 실렸다. 2000년부터는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에서 안내견의 출입 및 탑승을 거부하면 처벌받도록 법이 개정됐다.
지난 30년간 안내견 양성을 위해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의 훈련사가 예비 안내견과 함께 걸은 길은 81만㎞에 달한다. 그동안 총 280마리의 안내견을 배출했다. 1994년 첫 번째 안내견 ‘바다’를 분양한 이후 매년 12~15마리의 안내견을 분양하고 있다. 현재는 76마리가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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