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갑질’을 했다고 판단한 것은 브로드컴 직원조차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해 삼성전자를 협박한다고 인식한 정황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삼성전자는 ‘가진 카드가 없다’며 브로드컴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경쟁사 부품 쓰자 선적 중단
공정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브로드컴 직원들이 협상 당시 남긴 이메일, 업무 메모에서 양사 간 힘의 불균형이 드러났다. 브로드컴은 2019년 8월께 삼성전자가 갤럭시S20 스마트폰에 들어갈 부품 공급을 다변화하는 전략에 따라 경쟁사 부품을 채택하자 2020년 2월 삼성전자의 구매 주문 승인을 중단했다. 한 달 뒤인 3월엔 모든 부품의 선적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에 3년간(2021~2023년) 연간 7억6000만달러 이상의 부품 구매를 요구하는 장기계약(LTA) 체결을 요구했다. 브로드컴 담당자는 삼성전자에 취한 구매 승인, 선적 중단 등의 조치를 스스로 ‘핵폭탄’ ‘폭탄 투하’에 비유했고, ‘기업윤리에 반하는’ ‘협박’이란 표현도 이메일 형식으로 남긴 것으로 파악됐다.반면 삼성전자 측은 S20을 막 출시해 부품 수급이 중요한 상황에서 장기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실제 삼성 측 협상 담당자들은 “이따위를 (계약) 초안이랍시고 던지는 행태에 화가 치밀지만 카드가 없다” “생산라인에 차질이 우려된다” “브로드컴이 급한 게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후 2020년 3월 장기 계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장기 계약 이행을 위해 구매 대상이 아니었던 보급형 모델에까지 브로드컴 부품을 장착하는 등 2020년 5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총 8억달러 상당의 브로드컴 부품을 구매했다. 브로드컴은 공정위를 포함해 유럽연합(EU) 경쟁당국 등이 2021년 상반기 조사에 나서자 그해 8월 이 계약을 조기 종료했다.
공정위는 이 계약이 지속된 약 1년3개월 동안 삼성전자가 최소 1억6000만달러(약 2140억원)가량의 추가 비용을 부담하게 됐다고 봤다. 브로드컴 측은 “과거 삼성용으로 개발한 부품을 삼성이 일방적으로 계약 취소하면서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 적이 있어 장기 계약이 필요했을 뿐”이라며 자신들이 ‘을’(약자)의 입장이었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성, 민사소송 나설 듯
당초 공정위는 브로드컴의 행위에 대해 제재 대신 자진 시정(동의의결)을 수용했다. 브로드컴이 작년 7월 △반도체·정보기술(IT) 상생기금 200억원 조성 △부품 공급계약 체결 강제 금지 △삼성전자에 대한 부품 공급 및 지원 약속 등을 핵심으로 한 동의의결안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반발하자 공정위는 지난 6월 동의의결안을 기각한 뒤 제재에 나섰다.이 사건을 공정위에 신고한 미국 퀄컴의 선임법무이사도 공정위 전원회의에 나와 “브로드컴을 충분히 제재하지 않으면 반경쟁 행위를 지속할 것”이라며 브로드컴 제재 주장에 힘을 실었다.
삼성전자 측은 단가 인상뿐만 아니라 재고 증가 등 피해까지 합치면 총 3600억원 상당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입장이다. 산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해 피해보상을 받으려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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