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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아침 도쿄도 네리마구의 슈퍼마켓 아키다이 세키마치본점 앞에는 주인 없는 장바구니 200여개가 늘어선다. 9시 문을 열자마자 가게에 먼저 들어가려는 고객들이 장바구니로 벌이는 ‘오픈 런’이다. 도쿄의 여름은 아침에도 30도를 훌쩍 넘는다. 주인들이 그늘에서 땡볕을 피하는 동안 빈 장 바구니들만 200m 넘게 줄을 서서 가게가 열기를 기다린다.
네리마구 일대에 5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아키다이는 같은 제품을 한 푼이라도 싸게 파는 ‘서민 슈퍼’로 이름 나 있다. 야채 한 봉지를 단 돈 10엔(약 91원)에 판매하는 일요일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고객도 적지 않다. 예전부터 일요일 아침이면 남들보다 먼저 특별 할인상품을 쓸어담으려는 손님들의 장바구니가 100여개 늘어섰던 이유다.
장바구니의 행렬이 두 배인 200여개로 늘어난 건 작년 초부터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일본의 물가가 치솟기 시작한 시점이다. 아키바 히로미치 아키다이슈퍼 대표는 “물가가 급등하면서 모두가 생활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인상"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임금인상률이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하고 경제성장률도 높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키바 대표는 말을 잘랐다. "경제가 성장하고, 생활이 윤택해 졌는데 더운 여름, 원래라면 여유있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일요일 아침에 손님들이 이렇게 몰려들겠어요? 서민들은 삶을 지키는데 필사적입니다."
매장에서 만난 50대 주부도 “월급은 거의 오르지 않았는데 물가가 치솟는 바람에 식비를 줄이고 있다"며 "도대체 어떤 면에서 경기가 좋아졌다는 거냐"라고 되물었다.
손님이 두 배로 늘었으니 좋을 만도 한데 아키바 대표는 도리어 수익이 줄었다고 했다. 아키다이의 지난해 매출은 400억엔으로 1년 전보다 1억엔 가량 늘었다. 하지만 순이익은 수 천만엔 감소했다. 소비자 가격, 전기료, 운송료 등 비용이 모두 오른 탓이다.
같은 시각 도쿄의 대표적인 부촌인 미나토구에서는 아키다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작년 12월 1억5800만엔에 분양한 타워맨션(고급 초고층 아파트) ‘시로카네 더 스카이’ 80.40㎡형의 거래는 2억4800만엔에 이뤄지고 있다. 반 년여 만에 가격이 57% 뛰었지만 도쿄의 최고급 주택가 정중앙이라는 입지 덕분에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주로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도쿄의 부동산을 중개하는 주리얼에스테이트의 조민수 대표는“6월 한 달 동안에만 6건의 거래가 체결됐다”고 말했다.
최근 도쿄 도심 지역(23구)의 집 값은 서울 못지않게 치솟고 있다. 2022년 도쿄 도심 지역의 신축 아파트 평균 가격은 처음 1억엔을 넘어섰다. 올해 5월 평균가격은 1억1500만엔으로 1년 만에 48% 급등했다.
2021년까지만해도 서울의 70% 수준이었던 도쿄의 아파트 가격이 단기 급등한 건 외국인과 일본 부유층의 매수세가 크게 늘어서다. 시중에 돈을 무제한으로 푸는 대규모 금융완화가 10년 넘게 계속되면서 일본인들은 집값의 100%를 연 0.5%의 초저금리로 대출 받을 수 있다.
부동산과 함께 대표적인 자산시장인 증시도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6월 닛케이225지수는 33년만에 33,000선을 회복했다. 올 들어 지수가 25% 급등하면서 1989년 버블(경제)경제 붕괴 직전 기록한 38,915의 85%까지 회복했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인 렌고에 따르면 올해 일본 기업의 임금인상률은 평균 3.58%로 1993년(3.90%) 이후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의 실적과 설비투자도 사상 최고 수준을 회복했다.
각종 경제지표가 개선되면서 8월15일 발표된 2분기 경제성장률(실질 GDP) 잠정치는 전 분기보다 연율 기준 6.0% 성장했다. 전문가 예상치를 두 배 넘는 ‘깜짝 성장’이었다.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3% 상승했다. 15개월 연속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2%를 웃돌았다.
물가 상승률만 놓고 보면 일본이 정말 20년 넘게 디플레이션을 겪는 나라임을 실감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로 일본의 각종 경제지표는 지난 20~30년 동안 경험한 적 없는 활력으로 꿈틀거린다. 일부 전문가들이 이번에야말로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는 이유다.
10엔이라도 아끼려는 서민들의 장바구니 200여개가 늘어서는 아키다이와 반 년새 가격이 9억원 가까이 치솟았는데도 매수세가 끊이지 않는 시로카네 더 스카이.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일본 경제의 참 모습인걸까. '다타키 경제' 일본②로 이어집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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