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버스가 다가오자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A씨가 기다리던 버스를 지팡이가 감지한 것이다. A씨는 5분 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팡이에 대고 타야 하는 버스 번호를 말했다. 지팡이는 그 음성을 인식해 가장 가까운 버스를 찾고 실시간으로 거리를 측정했다. 버스 안에 설치된 ‘비콘(beacon)’ 센서를 통해 지팡이와 버스가 위치 정보를 주고받은 덕분이다.
버스가 가까워질수록 지팡이의 진동은 강해진다. 버스 도착을 인지한 A씨가 천천히 버스를 향해 걸었다. 정류장에 켜진 불로 시각장애인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버스 기사는 문을 열고 그의 탑승을 도왔다. 현대자동차와 기아 직원들이 교통 약자를 위해 고안한 ‘햅틱 네비게이터’ 기술이 상용화되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현대차·기아가 지난 22일 경기 화성 남양기술연구소에서 ‘2023 아이디어 페스티벌’ 본선 경연을 열고 임직원이 개발한 미래 모빌리티 기술을 대거 공개했다. 현대차그룹은 창의적인 연구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2010년부터 매년 이 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 주제는 ‘세상을 바꾸는 마음 따뜻한 기술’이었다. 이날 본선에는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는 제작 부문에 9개 팀,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을 이야기로 풀어 제안하는 시나리오 부문에 6개 팀 등 모두 15개 팀이 뽑혔다.
경연 결과 제작 부문에서는 ‘햅틱 내비게이터’가 대상을 가져갔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시각장애인이 일상에서 버스를 이용할 때 겪는 불편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평가다.
전기차에 신장 투석기 등을 설치해 환자가 차에서 바로 투석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고안한 ‘찾아가는 인공신장실’ 기술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전기차에 적용된 배터리 전력을 외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V2L 기술과 자동차·병원 간 쌍방향 통신을 지원하는 V2H 기술을 활용했다. 큰 병원이 없는 지방의 환자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으슥한 골목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자동차가 초동 조치를 해주는 ‘사각지대 보행자 사고 예방 기술’도 소개됐다. 주변에서 사람의 비명이 들리면 자동차가 라이트 켜기, 경적 울리기, 인근 경찰서에 알림 보내기 등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시스템이다. 청각장애인이 드라이브스루에서 수어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지털 사이드미러 수어 소통 시스템’, 전기차와 텐트를 연결해 차량 에어컨으로 10분 만에 텐트의 내부 온도를 10도 낮출 수 있는 ‘V2GO’ 기술 등도 눈길을 끌었다. 차가 ‘찾아가는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시나리오 부문에선 ‘공유 킥보드를 활용한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성 향상 기술’이 대상을 받았다. 수동 휠체어를 길거리의 공유 킥보드 서비스와 결합해 보다 편리한 주행을 돕겠다는 아이디어다.
현대차·기아는 아이디어 페스티벌에서 발굴한 임직원의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에 반영하고 있다.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신형 싼타페에 적용된 ‘양방향 멀티 콘솔’은 2021년 행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아이디어가 양산차에 적용된 사례다.
배성수/빈난새 기자 baeb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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