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퇴직연금 수익 못 낸 운용사 퇴출…가입자엔 "갈아타라" 공지

입력 2023-09-25 18:46   수정 2023-10-04 20:43

지난해 기준 한국의 10년간 연환산 퇴직연금 수익률은 1.93%, 호주는 8.1%였다. 퇴직연금 계좌에 100만원을 납입한 뒤 1년을 기다리면 호주에선 8만1000원이, 한국에선 1만9300원이 붙는다는 얘기다. 이 계좌를 그대로 둔 채 10년이 지나면 수익 격차가 거의 곱절 수준으로 벌어진다. 호주의 퇴직연금 가입자라면 약 222만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 가입자가 받아가는 액수는 120만원에 그친다. 한국 가입자의 노후 생활비 걱정이 그만큼 깊을 수밖에 없다.

해마다 6~9년 투자 성과 따져
호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퇴직연금 수익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비결은 치열한 시장 경쟁이다. 호주는 근로자가 소속 기업과 관계없이 가입 상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금형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가입자를 유치하려면 사업자가 좀 더 낮은 수수료로 보다 높은 수익률을 제시해야 한다.

당국이 매년 퇴직연금 상품을 솎아내는 ‘퍼포먼스(성과) 테스트’도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동력이다. 호주는 2021년부터 당국이 펀드별 수익률, 자산배분 구조, 수수료 수준 등을 따져 해마다 합격·불합격을 가린다. 투자 수수료와 세금 등을 뗀 실제 수익률이 기초자산별 기준 수익률보다 연간 0.5% 이상 낮으면 불합격하는 식이다. 해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통상 6~9년 중장기 투자 성과를 주로 따진다.

단순히 경고하는 수준이 아니다. 펀드가 한 해 미달 판정을 받으면 가입자에게 불합격 사실과 함께 다른 펀드로 옮기는 게 나을 수 있다고 고지해야 한다. 2년 연속 불합격하면 신입 가입자를 받을 수 없다.

린 켈리 호주 재무부 퇴직연금부문 담당 1차관보는 “호주는 펀드 규모나 안전자산 비중 등에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는다”며 “대신 성과를 따져 지속적으로 부진한 결과를 내면 시장에서 쫓아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국도 각 펀드가 자본을 잘 유지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해 수익을 내는지를 집중 검사한다”고 덧붙였다.
불합격 공지에 2년간 33조원 머니 무브
불과 2년 전 도입한 이 테스트로 인해 호주 퇴직연금 시장은 적자생존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한 펀드는 가입자를 뺏기다 다른 펀드에 흡수 합병되기 일쑤다. 지난해 불합격한 디폴트옵션 상품 5개 중 4개는 다른 펀드와 합쳐졌다. 나머지 하나는 아예 운용이 중단됐다. 글렌 매크리아 호주퇴직연금협회 정책총괄(CPO)은 “합병을 통해 퇴직연금 펀드 시장의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효과도 있다”며 “펀드 규모가 크면 공항·항구를 비롯한 주요 인프라 투자를 벌일 수 있고, 외부에서 제안해 오는 투자 기회도 더 다양해진다”고 말했다. 가입자가 늘어나면 1인당 운용 비용도 줄어든다.

2021년 제도 도입 이후 지난 8월 말까지 불합격 공지 등을 보고 투자 상품을 바꾼 호주 퇴직연금 가입자는 8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을 따라 총 390억호주달러(약 33조4530억원)가 이동했다. 수익률을 따지다 보니 호주 안팎의 상장주와 비상장주, 인프라 등 성장 자산 위주로 구성된 펀드에 가입자가 몰리고 있다. 지난해 기준 자산의 85.4%가 원리금 보장형에 묶여 있는 한국 퇴직연금과는 딴판이다. 매년 세계 연금제도 평가 보고서를 내는 연금 전문 자산운용·컨설팅업체 머서의 데이비드 녹스 시니어 파트너는 “호주 연금 사업자는 꾸준히 성과를 내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투자 포트폴리오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며 “이 때문에 시장 전반의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니=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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