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소르본대 입시에 실패한 18세 소녀가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을 내놓으며 프랑스 문단을 들썩이게 했는데, 우리나라에도 프랑수아즈 사강에 영감을 받은 10대 문학소녀들이 출현한다. 부산여중 재학 중에 쓴 <돌아온 미소>를 책으로 펴낸 양인자는 단박에 천재 문학소녀로 주목받는다. <학원>지는 ‘학원문학상’을 통해 이제하, 마종기, 황석영, 조해일, 최인호, 정호승 같은 문학 인재를 길러낸다.
‘문학소녀’란 현실성과 역사의식을 결여한 낭만적 꿈과 감상주의에 취한 채 말랑말랑한 문학을 소비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것은 남성 지식인이 창안한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한 차별적 명칭일 텐데, 1960년대에 널리 통용됐다. 1960년대를 표상하는 문화적 기표 중 하나이던 전혜린은 문학소녀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이 중 한 사람이다. 독서광이자 독문학 번역가로 알려진 그는 1965년 1월 11일에 갑자기 죽는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다.
그는 서울 동숭동의 ‘학림’ 다방에서 후배와 만나고 귀가한 이튿날 시체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 생의 순간들을 연소시킨 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맞은 전혜린의 죽음은 ‘천재의 요절’로 미화되거나 미스터리한 애정 스캔들로 소비됐다. 그가 죽고 1958년에서 1965년 죽기 직전까지 일기를 담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와 남은 글들을 그러모아 만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란 수필집은 폭넓게 읽히며 문학소녀들 사이에서 ‘전혜린 현상’이란 사태를 빚는다.
문학소녀들은 ‘전혜린 현상’에 취하고 열광했지만 그에게 덧씌워진 신비화로 인해 실체는 모호했다. 사실만 간추리자면, 전혜린은 1955년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러 독일 뮌헨대로 유학을 떠난다. 뮌헨에서 유학 중 결혼하고 임신한 채로 가사노동을 혼자 떠맡고, 유학생인 남편 뒷바라지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잡지사에서 청탁받은 번역 일감을 처리하느라 몸을 혹사한다. 그는 뮌헨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뒤 대학에서 강의하고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 같은 책들을 번역하다가 돌연 생과 작별한다.
문학 연구자 김용언은 <문학소녀>에서 작가를 열망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은 전혜린을 가리켜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청춘의 정신적 풍경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던 아이콘”이고, “아스팔트 킨트, 소식(小食)과 불면, 인식욕,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된다는 전혜린의 맹세가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다”라고 적는다.
많은 문학소녀가 교실 뒷자리에서 교과서 아래 전혜린의 책을 숨긴 채 탐독한다. 절대와 완전을 꿈꾸던 전혜린을 모방하는 문학소녀들이 잇따른다. 내 판단에 ‘전혜린 현상’과 문학을 동경하는 소녀가 늘어난 현상은 서로 맞물린다. 그는 일기에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라고 적는다. 문학소녀들은 그를 통해 뮌헨과 슈바빙, 안개비와 가스등을 연상하고, 검은 머플러와 아스팔트 킨트, 1960년대 명동의 낭만 시대를 동경한다.
전혜린을 감싼 신비의 베일은 서울대 법대 두 해 후배이자 작가인 이덕희가 1982년에 펴낸 <전혜린 평전>을 통해 얼마쯤은 벗겨진다. 전혜린이 죽은 지도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문학의 밤’을 흥청거리게 하던 그 많던 문학소녀, 즉 전혜린 키드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전혜린 키드의 실종은 문학과 책의 죽음이란 사태와 맞물린다. 문학은 더 이상 우리의 꿈도 희망도 그 무엇도 아니다.
문학다운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는 증강현실, SNS 네트워크, 디지털의 환각적 게임들, 음식 포르노인 ‘먹방’들, 소규모 악행들과 비릿한 욕망이 바글거린다. 문학소녀들이 사라진 오늘의 현실은 마치 폐허를 딛고 서 있는 듯 삭막하다. 우리는 그 폐허에서 새로운 ‘흑역사’를 써가는 중이 아닐까?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오늘은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그저 무심히 스치는 바람만 생각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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