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980년대 산업화로 영주대장간은 위기를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값싼 중국산 제품이 수입되면서 국내 전통 대장간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장간이 문을 닫았습니다. 영주대장간도 가동을 멈춰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50년 넘게 대장장이로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석 장인은 고가격·고품질 전략을 선택했다. 가격으로는 중국산 제품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소비자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자기 손에 맞는 물건을 씁니다. 중국산 호미보다 가격은 두세 배 비싸더라도 오래 쓸 수 있고 편안한 물건으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차별화 전략 덕분에 영주대장간의 호미는 산업화의 풍파를 견뎌낼 수 있었다. 석 장인은 영주대장간의 호미가 인기를 유지한 비결이 ‘선’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른 것처럼 농기구도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선’이 달라요. 그 미묘한 차이가 사용할 때 얼마나 편리한지를 결정하죠.”
석 장인은 물건의 품질뿐 아니라 소비자와의 관계도 놓치지 않았다. 조건 없이 배송비와 수리비를 전부 영주대장간에서 부담하는 무료 애프터서비스(AS)를 제공했다. 그는 “영주대장간이 쌓은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며 “오랜 시간 소비자를 생각하며 일해온 시간이 쌓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전통 기술을 보전해온 석 장인이지만 그는 변화와 시대의 흐름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2000년대 초반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 그는 일찍이 온라인 판매에도 나서면서 판로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온라인 판매로 점점 명성을 쌓아온 석 장인의 호미는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에 입점해 전 세계로 뻗어가기에 이른다.
그는 “유통회사가 연락해와 2013년 입점했는데 밭을 일구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2018년엔 아마존에서 2000개 넘게 팔렸다”고 했다. 한국인에겐 익숙한 호미가 외국인들 사이에선 ‘신기한 농기구’로 인식된 덕분이다. 그 이후 호미 생산량이 늘었고 지난해에만 호미 4만 개를 제작했다. 영주대장간이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10개국에 달한다. 최근에는 수출분이 국내 판매량을 넘어섰다. 그는 “일손이 모자라 생산량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일흔을 넘어갑니다. 일을 서서히 줄여야 할 시기인데 요새는 작업량이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도 제 이름을 걸고 만든 물건이 전 세계에 알려졌으니 지난 세월을 보상받은 기분입니다.”
석 장인은 대장장이로 살아온 56년 중 가장 뿌듯한 순간이 “지금”이라고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 남들처럼 어린 시절 추억이 없다는 게 항상 아쉬웠어요. 하지만 제 몸이 허락할 때까지 이 일을 할 겁니다. 은퇴할 나이인데 사람들이 아직도 제 물건을 찾는다는 건 축복이죠.”
영주=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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