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의 주제곡 '당년정'이 흐르면 마음은 이미 1980년대 홍콩 뒷골목에 가 있다. 선글라스를 쓰고 바바리코트를 걸친 사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친구를 위해 홀로 적진으로 향하는 의리 넘치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배우 저우룬파(주윤발)가 지금까지도 홍콩 영화의 '큰 형님'으로 많은 팬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유다.
저우룬파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의 영광을 안았다. 14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5일 부산 해운대구 KNN타워 KNN시어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기념했다. 유쾌한 농담을 건네면서도 영화계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질문엔 진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연기 생활 50년 만에 이런 큰 상을 받을 수 있게 돼 기쁩니다. 한국 팬분들이 보내주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 상은 매년 아시아 영화 산업과 문화 발전에 가장 두드러진 공헌을 한 아시아 영화인한테 돌아간다. 저우룬파는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를 이끌고 '홍콩 누아르'를 세계적인 장르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3년 영화계 입문 이후 50년간 '영웅본색' '첩혈쌍웅' '와호장룡' 등 수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이로써 지난해 량차오웨이(양조위)에 이어 2년 연속 홍콩 배우가 수상하게 됐다.
'큰 형님'으로서의 면모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지난 2018년 홍콩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6억 홍콩달러(약 8100억원)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정작 본인은 소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제가 기부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기부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1980년대 홍콩 영화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선 진지한 고민을 털어놨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부터 자국 내 검열이 심해졌다고 지적했다. "현재 홍콩 영화인들이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희는 홍콩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한국의 영화 산업에 대해서는 "한국 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은 자유도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가끔 '이런 이야기까지 다룰 수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넓은 소재를 다루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올해 68세를 맞은 만큼 최근 건강 이상설에 관한 루머가 돌기도 했다. 저우룬파는 "제가 단순히 아픈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는 가짜 뉴스를 읽었다"며 "(가짜 뉴스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다음 달 홍콩에서 열리는 하프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내일 오전에도 부산에서 10㎞를 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50년간 배우 생활 중 최고의 순간으로는 18세에 배우 활동을 시작한 시점을 꼽았다. "한 영화를 찍는 배우는 그 배역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제가 맡아온 캐릭터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우룬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60년을 두고 "인생의 제2막이 이제 막 열린 셈"이라며 배우로서의 포부를 드러냈다. 그는 오는 11월 국내 개봉하는 '원 모어 찬스'에서 자폐증을 앓는 아이를 둔 아버지를 연기한다. "저는 배역에 아무런 제한을 두고 싶지 않아요. 기회가 오면 어떤 역할이든 계속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부산=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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