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도 무진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강원 동해시 망상동에 있는 망상(望祥)해변이에요.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와 바람 소리에 ‘망상(妄想)’에 빠지기 좋은 장소죠.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망상보다는 몽상(夢想)이 좀 더 적확한 표현이겠으나 짐짓 망상해변의 망상(望祥)을 떠올립니다.
망상(望祥)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집에서 산에서 어디에서건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불 때마다 아버지는 “이야, 바람이 꼭 망상해변 같네”라고 하셨어요. 그때마다 저는 ‘특별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구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해변은 단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고 늘 ‘망상해변’인 점이 재미나기도 했죠. 정작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에는 가보지 못하다가 몇 해 전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초가을 망상해변의 바람은 시원하고 왠지 모르게 멋스러웠습니다.
기상 현상의 하나인 ‘바람’은 주로 기압 차이, 바다와 육지의 수열량(受熱量: 바다와 육지가 받아들이는 열의 양 차이)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합니다. 기상 현상에 사연도 장소성도 있을 리 만무하지만, 망상해변의 바람은 제게 참 특별했습니다. 마치 망상(妄想)처럼 실체 없이 소멸할지라도 기억에는 남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먼 훗날 글쓰기를 시작한다면, 망상(望祥)에 관한 걸 쓰겠다’고 오래전부터 다짐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인용했던 망상해변의 바람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저의 ‘망상’에 고유의 배경음악도 짝지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망상의 바람’에 음악을 새겼습니다. ‘무진의 안개’나 ‘이포의 파도’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와 합을 이루는 사실이 부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망상의 바람을 상상하며 듣게 된 음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첼로 모음곡 중에서도 6번 사라방드였습니다. 이 음악이야말로 망상해변의 바람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발견해 세상에 알린 위대한 연주자 파블로 카살스가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이 음악을 망상의 바람과 더욱 가까이 연결시켜 줬어요.
“이포의 파도에 어울릴 곡으로 말러 교향곡 5번 외에 다른 대안은 떠올릴 수 없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망상해변의 바람에는 바흐의 사라방드가 단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망상해변의 바람과 그에 관한 추억은 <무진기행> 속 안개, ‘헤어질 결심’의 파도만큼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평범하기만 한 장소라고 해도 고유의 기억과 이야기를 연결하고 음악을 곁들인다면, 그 이후에는 달리 보일 것입니다. 올가을에도 망상의 바람을 한 번 더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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