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 7일 이스라엘에서 대규모 살육과 민간인 납치를 자행하며 한동안 잠잠했던 중동의 갈등이 극단적인 모습으로 재현됐다. 이스라엘은 지상군을 동원, 가자지구를 완전 점령해 하마스를 절멸시키겠다고 공언했다. 하마스는 공습을 멈추지 않으면 인질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하며 결사 항전하는 동시에 아랍권 국가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번 공격을 ‘알아크사 홍수’ 작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알아크사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박해했다는 게 공격의 표면적인 이유다. 그러나 분쟁의 이면에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간 얽힌 복잡한 정치·경제·군사적 갈등이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주 사설에서 “이스라엘이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최악의 기습을 당한 것은 중동에선 전쟁이 평화협상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암울하게 상기시킨다”고 했다.
원유를 둘러싼 경제적 이해와 내전, 종파 갈등으로 분열된 중동 국가를 단결시키고 서방과의 대결 구도를 재차 끌어올린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오랜 원한이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은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최근까지도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은 레바논과 이란 등 주변국 영토를 무단으로 넘나들며 암살과 파괴 공작 등을 벌여왔다.
아랍 국가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자체를 자신에 대한 가해로 받아들였다. 유대인들은 20세기 초반 시온(예루살렘)에 국가를 세운다는 ‘시온주의 운동’을 통해 모여들었다. 예루살렘 일대를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7년 ‘벨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국가 승인을 약속했다. 이후 1948년 영국의 통치가 끝나자 전체 토지의 약 6%를 가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56%를 차지하고 건국을 선포했다.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이 다음날 곧바로 이스라엘을 침공해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서방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연패한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까지 밀리는 굴욕을 당하고 10개월 만에 전쟁은 끝났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패배를 거듭하고 이를 갈아온 이집트와 시리아는 1973년 10월 6일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을 시작한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양방향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라크와 사우디도 참전했다. 이스라엘은 개전 초반 전차와 공군기 상당수를 잃고 패망 위기에 몰렸으나 미국의 지원으로 영토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 협력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해 오일 쇼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요르단 등을 거점으로 투쟁해온 PLO는 이스라엘과 피해를 주고받은 끝에 1993년 오슬로협정을 맺고 강경 노선을 포기하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자국 극우파에 의해 암살되고, 강경파의 테러가 재발하면서 PLO는 힘을 잃고 하마스와 파타로 갈라졌다.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온건파인 파타 정권이, 가자지구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투쟁 노선의 하마스가 통치해왔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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