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은 깔끔하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회의 구성 원리로 쓰이는 견해들의 체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이념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기준은 ‘사회적 강제’다. 사회가 구성원인 개인에게 적용하는 강제가 크면 전체주의고, 작으면 자유주의다.
이념에 관한 논의들에선 흔히 전체주의와 자유주의를 하나의 스펙트럼에 놓아서, 대칭적으로 다룬다. 전체주의는 왼쪽 끝이고, 자유주의는 오른쪽 끝이다. 가운데는 ‘중도’라 불린다. 학문적 논의에선, 이런 관행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특정 사회의 맥락에선,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사회마다 정설(orthodoxy)이 있어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이념은 모두 이설(heterodoxy)이 되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특정 사회의 이념적 상황을 살피는 데 적합한 방식은 이념을 동심원들로 배열하는 것이다. 동심원의 핵심에 정설을 놓고, 정설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이설들을 배열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핵심인 정설이 큰 지지를 받으면 사회는 응집력이 커서 이념적으로 안정된다. 반면에 중심에서 먼 이설이 많은 지지자들을 얻으면, 사회는 응집력이 작아서 분열되고 이념적 대립이 깊어진다. 이설의 힘이 아주 커져서 정설을 누르게 되면 이설을 추종하는 세력이 권력을 차지한다.
우리 사회에선 자유주의가 정설이다. 개인들의 자유가 크고 사회적 강제는 작은 편이다. 특히 경제 분야에선 시장경제 체제를 지녀서, 개인들의 재산권이 보장돼 국가의 간섭이 그리 크지 않다. 그 덕분에 우리 사회는 빠르게 발전했고 안정됐다. 북한의 대조적 상황은 이 점을 늘 일깨워준다.
이 점은 기회가 나올 때마다 강조돼야 한다. 우리 헌법이 자유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았다는 점과 자유주의가 전체주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응집력이 강한 사회가 되고 자유주의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선 자유주의자들이 그리 많지 않고 자유주의에 대해 애착을 보이지 않거나 전체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오히려 많다. 이처럼 이념적 동심원에서 외곽이 비대하니, 우리 사회는 응집력이 약하고 전체주의에 점점 깊이 오염된다. 그래서 전체주의 색채를 짙게 띤 정권이 자주 나와서 도덕과 법을 허물고 안보를 약화시킨다.
자신을 ‘보수’라 여기는 사람들이 3분의 1가량 된다는 사정에서 그 점이 드러난다. 보수는 그 사회의 정설을 지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사회에선 자유주의자들이 보수고, 공산주의 사회에선 공산주의자들이 보수다. 보수의 역은 대안 세력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런 대안 세력은 으레 자신들을 ‘진보’라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 세력은 보수와 크기가 비슷하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우리 사회가 응집력이 약하고 부패가 심해진 것은 이런 사정에서 나왔다.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객관적 도덕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에 사회 자원을 동원하는 체제다. 따라서 자원의 동원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객관적 도덕에 어긋나도 선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악이다. 자연히, 객관적 진실도 없다. 자원의 동원에 도움이 되는 선동 선전이 최고의 진실이 된다.
객관적 도덕도 객관적 진실도 없으니, 전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평가할 객관적 기준이 없다. 자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행태에 대해 아주 너그럽고 조만간 타락한다. 역사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전체주의자도 전체주의 사회도 없었다.
자유주의는 헌법에 의해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가 됐고,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유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자명한 사실을 잊은 논평이 많다는 사정은 우리 사회가 앓는 중병의 증상이다. 윤 대통령의 핵심적 임무는 치적을 쌓아서 자유주의를 튼실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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