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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은 문화 예술의 해다. '007 시리즈'가 시작됐고, 비틀즈와 밥 딜런이 데뷔했다. 1962년에 태어난 배우도 유독 많다. 최민식, 톰 크루즈, 데미 무어, 짐 캐리, 조디 포스터, 랄프 파인즈, 존 쿠삭, 양조위, 주성치가 모두 이 해에 태어났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와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1962년생이다.
올해로 환갑을 맞는 이들은 세상의 온갖 신기한 일, 진귀한 일을 다 겪었겠지만 못 본게 하나 있었다. 바로 일본 백화점의 파업이다. 일본의 백화점이 파업한 건 1962년 한신백화점이 마지막이다. 이후 61년 동안 일본인들은 백화점 파업을 경험한 적이 없다.
지난 8월31일 도쿄 북서 지역 도심인 이케부쿠로를 대표하는 백화점 '세이부 이케부쿠로 본점'이 파업을 실시하면서 1962년생 문화 예술인들은 살아 생전에 일본의 백화점 파업도 지켜보게 됐다.
일본인 대부분은 백화점이 파업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만큼 파업 소식을 접한 첫 반응은 '왜?' 보다 '에??'가 훨씬 많았다. 일본의 모든 신문·방송이 연일 관련 소식을 톱 뉴스로 다뤘는데도 평소처럼 백화점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리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
이날 파업은 기습적인 것도,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하는 식의 장기적인 것도 아니었다. 세이부 이케부쿠로 본점이 소속된 소고·세이부 노조는 거의 한 달 전부터 사측에 파업권 행사를 예고했고, 오랜 줄다리기 끝에 실시한 파업은 8월31일 단 하루, 그것도 본점에서만 실시됐다. 나머지 9개 지점은 모두 정상적으로 영업했다.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겨우 하루 파업하려고 한 달 가까이 이 난리를 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일본은 파업하지 않는 나라다. 2022년 일본에서 반나절을 넘긴 파업은 33건에 불과했다. 일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에 따르면 파업에 따른 노동손실일수가 미국은 연간 약 150만일, 영국과 독일은 약 20만일인데 비해 일본은 1388일(2021년)에 그쳤다.
최근 20년을 되돌아봐도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쳤음직한 파업은 2004년 프로야구 구단 축소에 반발해 선수노조가 실시한 파업과 2019년 도호쿠고속도로 상행선 사노서비스에어리어(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종업원의 파업 정도다.
일본의 노조는 파업을 "회피해야할 것"이라고 인식한다. 일본 최대 노조인 렌고의 요시노 도모코 회장도 7월 기자회견에서 소고·세이부의 파업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파업은 헌법이 인정한 권리다. 단 전술(파업 실시 여부)은 개별 노조의 판단으로 렌고는 이를 지켜볼 것"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만 했다. '렌고의 모든 역량을 결집시켜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과 같은 발언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8월31일 단 하루 동안의 파업을 강행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파업은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드러난다. 파업을 강행하려는 노조와 이를 막으려는 회사 모두 협상의 설득 수단은 '폐(迷惑)를 끼칠 수 있다'였다.
회사는 노조에게 파업을 강행하면 "고객과 거래처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노조는 회사에게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고객과 거래처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파업이 불가피해 진 8월30일 소고·세이부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와 세이부 이케부쿠로 본점 1층 입구에 붙은 파업 안내문에도 일본 특유의 정서가 녹아있다.
소고·세이부 노조는 "정말로 제멋대로의 결정입니다만 8월31일 전관 임시 휴관을 하게 됐습니다. 세이부 이케부쿠로의 명성에 누를 끼쳤습니다. 고객과 거래처 분들께 폐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파업 안내문이라기보다 팀원들이 제일 바쁜 시기에 눈치를 보면서 내는 연차 신청서 같다.
고객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15년 가까이 이케부쿠로 본점을 이용한 49세 여성 회사원은 요미우리신문에 "정말 파업을 할 줄은 몰랐다. 세이부는 이케부쿠로의 얼굴이기 때문에 주민들도 걱정하고 있다. 백화점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진행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래저래 2023년 8월31일은 일본인들에게는 도쿄 도심 백화점이 파업을 했다는 사실에,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은 단 하루 동안의 파업에 일본인들이 저토록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에 경악한 하루였다. 파업 안하는 나라 일본②로 이어집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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