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를 좋아하는 대머리는 없다. 세상에 공짜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문장 자체가 틀린 문장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무료’라거나 ‘증정’이라는 표현으로 다가오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우리가 무형의 대가를 지불한 결과다.
가장 흔한 경우가 개인정보다. 기프티콘을 받기 위해,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개인정보를 건네고 상품을 수령한다. 주최 측의 ‘개인정보 이용 미동의 시 경품 수령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고지에 따라 우리는 개인정보를 기프티콘이나 경품에 거는 것이다. 이번 글은 가볍게 생각한 이벤트 참여가 큰 결과로 돌아온 나의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박람회에서 이벤트에 참여했고, 이벤트성 피부 관리를 받으러 갔다가, 직원의 영업에 못 이겨 60만 원을 결제하고 왔다. 또래나 혹은 또래가 아니더라도 순진한 누군가가 비슷한 일을 겪을 때 ‘그건 생각을 좀 해보면 좋겠다’는 권유의 차원에서 세세하게, 그래도 너무 길진 않게 설명할 예정이다.
요약하자면, 당신에게 정가보다 현저히 싼 피부 관리나 화장품 구매 권유가 들어온다면 일단 구매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고, 샀다면 구매에 확신이 들 때까지 3일은 개봉하지 말아라!
카페 용품 관련 박람회에 갔다. 목적은 맛있는 디카페인 원두를 찾기 위해서였다. 생각보다 맛있는 디카페인 원두는 찾기 어려웠고, 사람 많은 박람회장에서 실시간으로 기를 소진하며 걷던 와중 돌림판 룰렛 이벤트를 하는 부스를 발견했다. 부스 행사 내용은 간단했다.
- 설문조사에 참여한다 – 룰렛을 돌린다 – 경품을 받는다
구글 폼으로 제작된 설문은 피부 유형이나 직업, 나이 등을 물었다. 그리고 ‘개인정보 이용’에 동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마지막에 체크해야 했다. 동행의 폰으로도 대신해 총 2번의 설문조사를 했는데 아마 하나의 설문조사에서 개인정보 이용 동의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룰렛에는 ‘꽝’이 없었던 게 인상 깊었다. 평생 당첨 운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경품 수령이 가능하다는 점에 마음을 빼꼈던 모양이다. 당첨된 건 화장품 샘플과 물티슈였다.
박람회에서는 원래 계획했던 디카페인 원두를 제외하고 그냥 원두, 드립백, 세작 잎차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했다. 만족스러운 방문이었다고 회상하며 열심히 커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회사에서 근무 중이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그때 박람회에서 이벤트 참여하셨죠?”
아마 그랬던 것 같아서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이벤트의 2등에 당첨됐고, 그쪽은 20만 원 상당의 피부 관리를 제공할 것이고, 법적으로 공짜는 안 되어서 재료비 2만 원만 들고 오라는 게 통화의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 열심히 말하는, 내 또래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직원의 대화를 끊거나 무시할 수 없어서 가겠다고 결정했다. 2만 원이야, 커피 며칠 안 먹으면 모이는 돈이니까.
다시 돌아온 토요일, 피부 관리를 위해 서초구 모처에 위치한 숍에 방문했다. 데스크 직원, 초기 상담 직원, 피부 관리 직원, 관리 후 영업 직원이 모두 달랐다. 피부 관리를 받고 나올 때까지는 괜찮았다. 어깨와 등을 풀어주는 안마가 특히나 시원해서 경락이 비싼 이유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피부 관리를 받은 후에는 처음의 상담 직원과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자신을 팀장이라고 소개한 직원은 피부 사진을 찍고 상담을 도와주겠다고 설명했다. 호기심이 지나친 내가 재료비 2만 원에 피부 진단 비용 1만 원까지 냈기 때문이다. 직원은 친절했다. 내 피부가 정말 젊고(난 아직 30대도 되지 않았다), 결이 좋으며(스킨 로션도 꼬박꼬박 바르고 있다), 관리를 하면 더더욱 좋아질 피부라고 했다. 다른 일에는 “어쩌라고”를 자주 실현하는 나도 좁은 ‘상담실’에 앉혀 놓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하니 혹했다.
직원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내 피부 상태를 10분 정도 설명하더니 관리 상품에 대해 30분 간 떠들었다. 원래는 월 30만 원 상당의 관리를 1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VIP 회원을 이벤트 당일에만 바로 시켜준다, 자신의 VIP 전담 팀장이라 안정화 된 후에는 다른 사람이 담당해줄 것이다, 월 10만 원 정도 비용으로 약 60만 원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고민하니) 원래 3개 중 택일인 상품을 세 개 모두 넣어주겠다는 유혹 섞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후 ‘구매 하실래요?’가 아니라 ‘카드는 몇 개월 할부로 할까요?’ 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답변 대신 놀란 듯, 모호한 표정을 보였다. 빈 틈을 주지 않는 직원의 설득은 또 다시 이어졌다. 처음에는 1년 120만 원인데, 금전 사정이 어렵다고 하시니 6개월 60만 원만 결제하셔라 등등 정해진 레퍼토리를 달달 외운 사람 같았다.
나는 지쳤고, 이 사람의 시간을 뺐었다는 게 미안했고, 이 사람도 이게 생업일 텐데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결제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얼마를 일해야 60만 원을 버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상담은 피부 관리 계약인 것처럼 개월 수와 총 받을 수 있는 관리 횟수를 논하며 이뤄졌지만, 계약은 화장품 구매 계약이었다. 계약서만 보면 스킨, 로션, 앰플 2개를 60만 원에 구매한 셈이 됐다. 상품 구매에 따른 서비스인 피부 관리의 유효 기간은 9개월이었다. 나는 그걸 정확히 모른 채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모든 스트레스의 원흉이 되었다. (절대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서명은 하지 말자)
말도 안 되게 대충 만든 것처럼 생긴 화장품 세트를 들고 집에 올 때까지 나는 “그래, 저분들도 먹고 살아야지, 이 기회에 경험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품을 뜯어서 발랐다. 서류상 이제 환불은 불가했다. 이런 이야기를 주변 어른들에게 하자 요즘도 그런 곳이 있냐며 분노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유명한 수법의 강매라고 한다. 검색하니 요즘엔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보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강압적으로 혼을 빼놓은 다음 강매를 하는 게 흔한 일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환불 가능성을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피부 트러블이 심해져 전문의 진단서를 떼고 상품을 환불 받았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소비자 피해 구제센터, 서초구청 등 각종 공공기관에 전화를 해봤지만, 계약 과정을 일일이 알 수 없고 계약서 상 서명을 했다면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고 했다.
이 일을 겪으며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돈이 얼마든 쓰고 싶지 않은 곳에 쓰면 기분이 나쁜 법”이라며 인생 조언을 해주고, 환불 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방법을 함께 알아준 선배님께 특히 감사하다. 생판 모르는 내게 ‘세상은 험하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고 조언한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동료분들께 정신적 지지와 조언을 많이 들어 든든했다.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 게 좋겠지만, 만약 생겼다면 이곳저곳에 당한 일을 알려보자. 그게 생판 모르는 옆 팀 부장님일지라도.
황태린 님은 지구종말론의 혼돈 속에서 태어나 자연에게 배우며 자랐다. 역사, 심리, 소설, 인간, 테크 등 다양한 분야를 ‘덕질’하던 유년을 지나 지금은 홍보대행사 2년차 막내 직원을 거치는 중이다. 문예창작 전공으로 글로 배운 건 글뿐. 세상을 온몸으로 버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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