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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나도 계속 떨어지는 구리 가격
구리 생산 기업들, 살기 위해 이합집산
전쟁이 나면 총알이나 포탄을 만들기 위해 금속 원자재가 특수를 누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20세기 초중반 1·2차 세계대전 시절 얘기다. 구리 철 알루미늄 등 금속 원자재는 건설 산업에 가장 많이 쓰인다. 자동차와 선박, 산업용 기계 등 민수용 생산·소비재 제조에 따른 수요가 군사용 수요보다 훨씬 많다. 개인화기 탄약 한 발에 쓰이는 구리의 양은 5~9g 정도에 불과한 반면, 전기 승용차(EV) 한 대에 사용되는 구리의 양은 80~90kg에 달한다.
국지전은 경제적 혼란을 일으켜 오히려 글로벌 수요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지난해 러시아가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S&P글로벌 등 시장 분석 기관들은 러시아산 원자재 공급 차질로 인한 혼란을 우려했다. 그러나 중국 등 주요국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제외한 대부분 원자재 가격은 하향 안정화 추세다. 구리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많이 수출하는 알루미늄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산 알루미늄이 외면받으면서 가격이 상승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지만 시장은 이 같은 우려를 비웃었다.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러시아산 알루미늄을 시장에서 소화했고, 일부 국가 기업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오히려 러시아산 원자재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29년만에 최대폭 '콘탱고'(현물 가격 약세)
구리 가격은 올들어 내림세를 지속하고 있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며칠후 구리값은 파운드당 4.89달러까지 치솟았지만, 이후 하락을 거듭해 최근 파운드당 3.57달러 수준으로 27%가량 떨어졌다. 수년 전부터 신재생에너지 보급과 전기차 생산에 필요한 구리 등 필수 금속이 부족해질 것이란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다. 2030년 글로벌 구리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약 10% 부족해진다는 계산으로,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온다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최근까지는 중국과 유럽 등의 부진한 경기 회복세가 구리 가격을 오히려 끌어내리고 있다. 런던금속거래소(LME)의 재고가 늘어난 탓에 선물 가격에 비해 현물 가격이 대폭 낮아진 '슈퍼 콘탱고' 상태도 지속되고 있다. 원자재 전문매체 마이닝닷컴에 따르면 지난달 구리 현물은 3개월 선도 가격에 비해 t당 70.1달러 할인된 가격에 거래됐다. 현물과 3개월 선물과의 가격 차이는 1994년 이후 29년만에 최대폭으로 벌어졌다.
전기차, 풍력·태양열 발전단지, 고압 케이블에 들어가는 구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부진으로 전기차 판매량은 기대만큼 늘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며, 유럽 각국은 앞다퉈 탄소배출 저감 목표를 조정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달 휘발유와 경유를 사용하는 내연기관 차량 판매 금지 시기를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미룬다고 발표했다. 중고 내연기관차 거래는 2035년 이후에도 허용할 방침이다. 같은달 스웨덴도 내년 기후 대책 관련 예산안을 2억5900만크로나(약 310억원) 삭감했다. 내연기관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유류세를 감면해주기로 했다.
다만 시장에선 구리 가격이 단기간 하락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급등할 것이라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전기차와 재생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 따른 수요 증가로 구리 시장에선 2027년부터 심각한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 구리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고 있어서다.
잇따르는 구리 광산 관련 M&A
구리 생산 비용은 급등하는 데 가격은 떨어지자 업체들은 간의 인수 합병이나 공동투자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새로운 광산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자본 규모가 최근 몇 년 사이 약 1.5배로 급증해, 평균 30억~40억달러 수준의 거액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강화된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이 늘어난 데다, 인건비와 비용 조달금리가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컨설팅 기업 EY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의 자본 투자가 필요한 132곳의 광산 개발 프로젝트를 검토한 결과 5곳 가운데 1곳이 평균 5억달러 가량의 손실에 직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업계 소식통을 인용해 향후 6개월~1년 사이 구리 기업과 광산 관련 거래가 줄을 이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일부 기업들은 전략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기업을 인수하는 한편, 투자 위험을 줄이기 위해 광산 공동 개발을 추진하는 업체들도 많다. 원자재 기업 글렌코어는 아르헨티나 구리 광산인 미네라 아구아리카 알룸브레라와 엘 파숑에 대해 일본의 스미토모 메탈 마이닝 등으로부터 공동 투자 제안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에 따르면 이 광산에선 연간 총 43만5000t의 구리를 생산할 수 있다. 캐나다의 런딘마이닝도 아르헨티나의 호세마리아 광산 지분 40~50%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 무역회사 및 대형 광산업체들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런딘마이닝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구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구리 공급을 유지하고 새로운 공급처를 찾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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