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명주’가 있는 중국 상하이 푸둥 금융가에서 차로 20여 분 달리면 민항취 우징이라는 곳이 나온다. 서울의 사당동쯤 된다. 상하이시가 2036년 올림픽 개최를 위해 개발을 준비 중인 보류 지구와는 직선거리로 1.5㎞다.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다이킨공조, 인포시스 등 글로벌 기업이 즐비한 이곳에 이랜드 이노베이션 밸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옛 도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풍스러운 붉은색 벽돌의 건물 5개 동 앞에 서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중국에서 다들 탈출한다는데 이랜드는 어떻게 상하이 한복판에 이만한 땅을 받을 수 있었을까.’
당초 이랜드는 이곳을 중국 본사 및 물류센터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19를 겪으며 전략을 바꿨다. 건물 일부를 한국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상하이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내어주기로 했다. 오피스가 들어설 A동 7~10층에 중소기업 전용 사무실을 마련할 예정이다.
B, C동은 첨단 스마트 물류로 무장한 동대문 패션 생태계를 그대로 구현했다. 이랜드뿐만 아니라 중국 패션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이 원단 가봉에서부터 디자인까지 한 곳에서 할 수 있도록 집적 효과를 내려는 전략이다.
흥미로운 건 상하이시의 행보다. A동에 원스톱 출장 사무소를 열기로 했다. 상하이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이 한 곳에서 인허가와 관련한 모든 절차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도다. 공무원 도장의 권력이 어느 나라보다 센 중국에서 과거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변화다.
이랜드는 1994년 상하이 법인을 세우고, 2년 뒤 첫 브랜드 사업을 전개했다. 중국에서 ‘중화자선상’을 네 차례 받았다. 중국에 진출한 전체 외자(外資) 기업 중 사회공헌으로 최다 수상 기록을 썼다.
착한 일 많이 하며, 오래 버틴 것만이 이랜드의 성공 비결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랜드는 중국 시장의 변화를 누구보다 깊숙이 주시했다. 2001년 100억원이었던 중국 이랜드 매출은 2010년 1조원을 돌파했다.
롯데, 신세계라는 ‘유통 거인’들이 두 손 들고 나간 중국 유통 시장에 이랜드는 2016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쇼핑몰과 아울렛을 결합한 대형 점포를 상하이, 청두에 3개 운영 중이다. 곧 2개를 더 열 계획이다. 매출 2조원 고지가 머지않을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기업치고 중국 문제를 고민해보지 않은 곳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 기회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다. 상하이시 공무원의 원스톱 서비스만 해도 중국의 콧대가 코로나 이전에 비해 한결 낮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 내 한류 열풍도 예사롭지 않다. 상하이 중심가엔 ‘서울 야시장’이란 간판이 붙은 포장마차 거리가 매일 불야성이다.
중국이 ‘한국 때리기’에 나서기 직전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여파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워낙 호되게 당한 터라 새로 기회의 문이 열려도 그것이 기회인 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냉정하게 중국 시장을 다시 들여봐야 할 때다. 이번에는 이랜드처럼 치밀하고 뚝심 있게 나아갈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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