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 무결한 조성진, 또렷하고 강렬한 임윤찬…11월 세기의 건반 대결

입력 2023-10-19 18:18   수정 2023-10-20 02:19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이 나란히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조성진은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고, 임윤찬은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손잡고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에서 주목해야 할 건 두 피아니스트의 레퍼토리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으로 같다는 점. 한 작품을 두고 완전히 다른 색채와 해석을 선보일 조성진 임윤찬의 연주를 불과 2주 간격으로 만나볼 기회란 얘기다. 이들의 음악 세계를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는 필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1806년 그의 귓병이 급속도로 악화하던 때 쓴 작품이다. 작곡가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던 난청 진단에 좌절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운명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직 예술, 그것만이 나를 붙들었다. 죽음이여 올 테면 와 보라. 나는 용감하게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中)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 쓴 것처럼 베토벤은 예술가로서 식지 않는 창작열과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이어갔다. 그로부터 10년간 치열하게 작곡 활동에 매달렸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4번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5번 ‘운명’ 등 베토벤의 수많은 명곡이 쏟아진 이 시기를 ‘걸작의 숲’이라 일컫는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베토벤이 쓴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활기찬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베토벤 작품에 흔히 기대할 만한 투쟁적인 성격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당시 요제피네란 여인과 연애 중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에서 오는 설렘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자연스레 그의 영감에 반영된 셈이다. 낭만적인 작곡 배경 외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베토벤이 직접 초연한 마지막 협주곡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극도로 나빠진 귓병 탓에 그가 다음으로 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독일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에 의해 초연돼야 했다.

온화한 성격의 곡이지만 피아니스트 사이에선 가장 연주하기 두려운 협주곡 중 하나로 악명 높다. 초인적인 힘과 기교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선율, 화성, 테크닉 등은 단순한 편인데 이를 통해 표현해야 할 감정은 복합적이어서다. 탄탄한 기본기와 섬세한 표현력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면 자칫 지루한 연습곡처럼 들리기 쉽다. 조성진은 이 곡에 대해 “신비로우면서도 여성스러운 곡이지만 그 안에 베토벤의 카리스마, 열정 등 다양한 감정들이 녹아 있다”며 “피아니스트로서 이를 제대로 표현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G장조 협주곡인 이 작품은 처음부터 혁신적이다. 협주곡에선 오케스트라의 기나긴 서주 뒤로 솔리스트가 등장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곡은 정형화된 틀을 깨부순다. 오케스트라 연주 없이 다섯 마디로 된 피아노 독주로 시작을 알린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에 나오는 동기(다다다 단)를 연상케 하는 셋잇단음표 리듬, 신비로운 선율 진행이 인상적이다.

이 악장에선 공격적이거나 호전적인 악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폭발적인 음향의 트럼펫과 팀파니가 한 차례도 소리 내지 않을 정도다. 오로지 가벼운 리듬과 깔끔한 꾸밈음, 따뜻한 음색으로 이뤄진 순수한 피아노 선율과 광활한 음악적 흐름을 조성하는 오케스트라 선율이 대화하듯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벅차오르는 희열을 불러일으킨다.

느린 2악장에선 날카로운 부점(附點), 저음을 타고 움직이는 엄숙한 오케스트라 주제와 조용하게 현실의 고통을 읊는 듯한 무거운 피아노 선율이 끊임없이 대조와 조화를 이루며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마지막 3악장. 오케스트라가 16분음표 리듬을 짧게 끊어 연주하며 경쾌한 악상을 불러내면, 피아노가 기다렸다는 듯 명료하면서도 정확한 터치로 전체 음향을 장악하면서 베토벤의 열정을 살려낸다. 그간 자취를 감췄던 트럼펫과 팀파니도 합류해 팡파르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양감을 만들어낸다. 끝에 도달할 때까지 고조되는 오케스트라의 황홀한 색채, 피아노가 펼쳐내는 응축된 에너지에 온 감각을 집중한다면 베토벤이 그려낸 절정의 환희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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