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향에선 짙푸른 쑥 냄새가 난다. 오묘하니 깊숙하다. 민족의 시원(始原)이 느껴지는 것 같다. 마늘과 함께 쑥을 먹었다는 단군 어머니의 내음이 국화 향기 비슷하지 않을까. 국화와 쑥은 계통상으로 가깝다. 쑥, 망초, 곰취, 쑥갓… 국화과에 속하는 이들은 냄새로도 같은 혈족이다.
국화 향기가 오묘하니 깊숙하다는 느낌은 민족의 기원을 냄새로 설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다. 우리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민족 아닌가. 냄새도 그런 경우가 있다. 강인하고, 끈질기고, 아스라한 조상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향기 말이다. 바람 좋은 날 국화꽃 만개한 들판에 서 보라. 꽃향기에 황홀해져서는 오묘하니 깊숙해진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득한 어머니가 찾아오시는 것 같다.
국화는 서리를 맞고도 핀다. 고난을 승화시켜 아름다움으로 바꾼다. 국화의 비유적 표현인 오상고절(傲霜孤節)은 고난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를 나타낸다. 그런 선비에게 국화 화분을 선물하는 풍속도 있었다. 조선 명종 때 송순이 지은 시조에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라는 구절이 보인다. 교양인의 기품을 칭송하는 특별한 선물 문화다. 오늘의 국화는 고인 영전에 바치는 꽃이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생긴 조화(弔花) 문화에 흰 장미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우리 땅에선 이를 구할 수 없어 흰 국화로 대체하게 됐다고 한다.
국화 콘텐츠를 다시 생각한다. 국화는 민족 시원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고난을 이겨낸 여성성의 상징이자 격조 높은 선물이기도 한 국화. 얼마 전 사무실에 노란 국화 화분을 들여놨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가을 선물을 하고 싶었다. 창밖의 하늘은 푸른데 책상 옆엔 황금 단추 같은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선 도란거리는 듯하다. “어려운 날들을 잊어선 안 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는 국화가 슬픔의 꽃이 아니라 인내와 성취의 꽃이라고 노래한다. 이 명시를 한국의 전통 정악으로 작곡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 생각도 난다. 두 분 다 시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예술의 꽃이 된 천생 한국인이다. 오늘 아침, 국화 옆에서 시와 음악을 새로 만난다. 국화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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