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은 1945년 유엔 창설을 기념하는 유엔의 날이다. 1975년까지만 해도 공휴일이었으나 지금은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을 기념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것도 일부 관련 인사들만 참석할 뿐 대부분의 사람은 유엔의 날에 대해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분들이 잠들어 있는 유엔기념공원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2023년 4월 5일 준공 72주년을 맞은 유엔기념공원에는 호주(281명), 캐나다(381명), 프랑스(47명), 네덜란드(122명), 뉴질랜드(32명), 노르웨이(1명), 남아프리카공화국(11명), 튀르키예(462명), 영국(890명), 미국(40명), 한국(38명), 기타(15명) 국가의 전사자 총 2320명이 안장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가운데 미군 전사자가 가장 많았으나 미국은 3만6492명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이송했다. 휴전 후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에서 한국에 안장되기를 희망한 40명만이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모두 사병 출신이다. 장성 출신으로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사람은 리차드 위트컴 한 명뿐이다.
‘알면 알수록 감동적인 사나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나이,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위트컴 장군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였던 1953년 유엔군 제2 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의 계급은 준장이었다. 1954년 말에 전역한 후 한국에서 살다가 1982년 7월 12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지 40년 만인 2022년 위트컴 장군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최고 영예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위트컴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발판이 된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수송과 보급 전문가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위트컴 장군이 한국에 부임한 1953년, 부산에 엄청난 불이 났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앞 대화재로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국가도 대책을 세울 수 없었던 전쟁 직후, 위트컴 장군은 대규모 천막촌을 마련하고 침대와 이불, 옷과 식량까지 제공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미국으로 소환되어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이 “군수물자를 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사용했느냐”고 호통치자 위트컴이 답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이 답변으로 위트컴은 큰 박수를 받았고, 구호금을 모금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트컴 장군은 폐허가 된 부산의 도시 기능을 살리기 위해 AFAK(미군대한원조)를 발족하고 191개 사업을 진행했다. 1953년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00만 달러의 AFAK 예산이 부산에 투입됐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AFAK는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 건립 지원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 도로 개설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고, 그 중심에는 위트컴 장군이 있었다.
2011년부터 부산시와 뜻있는 사람들이 위트컴 장군 기리기에 나섰고, 부산 시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위트컴 장군 기념 조형물’을 오는 11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리차드 위트컴>에는 장군의 업적과 그의 아내 한묘숙 여사의 헌신, 위트컴 장군을 기리는 부산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 있다. 저자 오상준 기자는 이 책이 “향후 체계적인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널리 쓰이길 기대한다”고 밝혔는데, 앞으로 연구가 이어져 위트컴 장군의 업적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지길 기대한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