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 당신 뒷자리에 잠깐만 앉게 해 주세요.”
1894년 프랑스 파리 최고의 ‘핫플’(핫 플레이스)이었던 클럽 물랭루주.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귓가에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금 쉰 듯했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독특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부탁이니 잠깐만 고개를 돌리지 말고, 내가 하는 이야기만 들어봐 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남자의 말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었고, 말투는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싶어진 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여성은 얼어붙었습니다. 남자의 외모가 상상과 달랐거든요. 당시 사람들은 그 남자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커다란 검붉은 얼굴, 보통 사람 얼굴만한 코와 턱, 두껍고 축축한 데다 이따금씩 침을 흘리는 입술. 수염으로 미처 다 가리지 못한 두껍고 축축한 입술.” “큰 머리와 손을 가진 일종의 괴물.” “머리와 몸통만이 정상적으로 성장했으며, 머리는 처진 어깨에 쑤셔 박힌 것처럼 보였다. 팔과 다리는 여섯 살 어린아이의 것.” 기겁한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쳐 버렸습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술이나 한잔 더 하자고.” 씁쓸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말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로트레크는 당대 파리 사교계와 미술계의 ‘스타’였지만 유전병 탓에 특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여성들은 언제나 그를 외면했습니다.
그런데도 로트레크는 늘 클럽에 ‘출근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로트레크의 삶과 작품세계를 따라, 19세기 말 파리 클럽의 그 황홀한 혼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린 시절 로트레크는 귀엽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자라나면서 그의 몸에 숨어있던 갖가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로트레크는 치통과 관절통을 비롯한 온갖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걸음걸이도 어딘가 서투르고 뻣뻣했습니다. 뼈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뒤틀리는 유전병 때문이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산책하다 넘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진 로트레크는 이듬해 집안에서 마룻바닥에 넘어져 다른 쪽 다리마저 부러졌습니다. 할머니는 그가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는 “성장통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바깥 활동을 잘 안 해서 뼈가 약해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직감했습니다. 자기 다리가 결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요.
어쨌거나 로트레크는 무려 3년이나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친구도 없이 병원에 갇혀 있는 생활. 하지만 좋은 일도 있긴 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샤를 삼촌이 로트레크에게 수채화를 가르쳐준 겁니다. 로트레크는 특히 사람과 동물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창밖에 보이는 움직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동경했기 때문일 겁니다.
세월이 흘러 17살이 된 로트레크는 마침내 퇴원했습니다. 다행히도 다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뼈는 튼튼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입원하기 전과 딴판이었습니다. 상체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좀 과하게 큰 코와 목젖, 종종 침이 흐르는 두꺼운 입술을 빼면요. 하지만 다리만큼은 14세에서 성장이 멈춘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그의 키는 152cm에서 멈췄습니다.
부모님의 불화,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조금 뒤틀린 애정, 신체적인 장애. 그 속에서도 빛나는 눈과 섬세한 손. 비운의 천재 화가를 만들 재료는 이렇게 모두 갖춰졌습니다.
지금이야 파리의 대표 관광지 취급을 받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몽마르트르는 ‘달동네’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바위로 된 높은 언덕이어서 제대로 된 건물을 짓거나 물을 끌어 올리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곳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살았습니다. 범죄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18세기에는 선술집 한 곳에서 일주일 동안 살인사건이 10건이나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충격받은 평범한 사람들이 마을을 우르르 떠나버리면서 훔칠 게 없어진 도둑과 소매치기들이 대거 실업자가 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로트레크가 스튜디오를 얻은 19세기 말 들어 이곳은 점차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술집과 클럽이 문을 열었고, 파리의 답답한 귀족적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몰려들었지요. 로트레크처럼 돈 많은 젊은이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밤이 되면 몽마르트르 사람들은 모두 클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로트레크는 클럽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온갖 사람이 다 모이는 이곳은 그에게 일종의 커다란 극장처럼 느껴졌습니다. 로트레크 자신은 외모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청춘을 즐기는 건강한 행운아들을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병석에 누워 창밖을 달리는 아이들을 쳐다봤던 것처럼요. 반면 로트레크처럼 어딘가 아픈 사람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멀쩡해도, 술의 힘을 빌리거나 춤을 추는 것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이 아픈 이들 말입니다.
그 사이에서 로트레크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클럽에 출근해 술을 마시며 그곳에 펼쳐지는 다양한 장면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새 친구도 여럿 생겼습니다. 로트레크는 뛰어난 재치와 말솜씨의 소유자였습니다. 귀족적인 말투와 저질 속어가 섞인 그의 말은 독특한 매력을 풍겼습니다. 자기 외모를 소재로 자학 섞인 유머를 구사해 사람들을 ‘빵’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짓궂은 농담도 사람 좋게 웃어넘겼습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던 그가 연필을 놓고 일어서자 한 친구가 “아저씨, 지팡이 놓고 갔어요!”라고 소리쳤고, 로트레크는 누구보다도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예술에 대한 로트레크의 진지한 열정과 그림 실력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886년 파리를 찾은 빈센트 반 고흐와 만났을 때가 대표적입니다. 로트레크는 고흐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했고, 고흐는 그의 작품에 감동했습니다.
그럴수록 로트레크는 주류 미술계와 반대의 기법을 썼고, 새로운 재료와 매체를 과감히 시도했습니다. 천재성과 그간 미술을 공부하며 쌓은 탄탄한 기본기, 참신함이 만나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용기 있는 평론가들도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평론가는 말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정확하고 깊이가 있다. 심오한 분석을 통해 내밀한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로트레크가 배우와 가수들을 그린 포스터로 몽마르트르의 ‘슈퍼스타’가 된 게 이때입니다. 샹송 가수인 아리스티드 브뤼앙을 그린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브뤼앙의 특징은 엄청난 성량과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 브뤼앙과 함께 군 복무를 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같은 부대에 있었는데, 전신마비 환자도 벌떡 일어나서 행진해야 할 것처럼 군가를 부르더구먼. 트럼펫을 삼킨 줄 알았어.” 이런 실력 덕분에 인기를 끌었던 브뤼앙은 자신이 공연할 때마다 로트레크에게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고, “로트레크의 포스터를 무대에 붙이지 않으면 공연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도 그럴 만했습니다. 당시 1880년대는 판화와 일러스트레이션 등 대중적인 미술이 막 싹트기 시작했던 시기. 포스터를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하는지 감을 잡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포스터의 본질이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했습니다. 게다가 예술성까지 뛰어나서, 포스터를 벽에서 몰래 떼어내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사람들도 적잖았습니다. 그럴수록 주최 측은 포스터를 더 찍어서 붙였고, 공연은 더욱 화제가 됐습니다.
인기 댄서인 ‘라 굴뤼’와 ‘잔 아브릴’도 로트레크 덕분에 전설이 된 사례입니다. 이들은 로트레크의 작품 덕분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잔 아브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유명해진 건 물론 그 사람 덕분입니다. 나를 그린 로트레크의 포스터가 붙은 그 순간부터….” 평범한 클럽 댄서로 잊혔을지 모를 두 사람은, 로트레크 덕분에 춤을 그만둔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이베트 길베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키가 크고 마르고 팔이 길었던 그녀는 검은 장갑을 끼고 취하는 특유의 우아한 제스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녀와 친했던 로트레크는 그 모습을 담은 그림과 포스터를 여러 장 그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예쁘게 그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충격을 받은 길베르가 애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발 그렇게 못생긴 모습으로 그리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당신이 보내준 스케치를 보고 많은 사람이 비명을 질렀답니다….”(1894년 편지)
하지만 나이가 든 후 길베르는 자서전을 통해 로트레크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자신이 불멸의 이름을 얻은 건 로트레크의 작품 덕분이었다면서요. 비록 그림이 사실적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장에서 길베르를 보는 느낌을 완벽하게 잘 표현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길베르가 긴 팔을 휘두르며 장갑을 낀 손가락을 쫙 펼쳐서 청중에게 인사를 하는 그 순간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느낌과 분위기를 사진보다 더 잘 담아냈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실 로트레크와 길베르는 어떤 의미에서 닮은 꼴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길베르는 별로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세심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개성으로 관객들의 감성을 흔들었습니다. 로트레크의 그림도 마찬가지였지요. 길베르는 자서전에서 말했습니다. “로트레크는 말하곤 했다. 추한 것은 항상 아름다운 면을 함께 갖고 있으며, 다른 누구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라고. 왜 그가 나를 그렇게 못생기게 그렸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로트레크의 예술은 이렇게 격동의 시대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반면 로트레크의 외모나 성격, 예술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중에는 가족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뼛속까지 귀족 정신에 젖어 있던 가족들은 그의 예술이 저속해서 귀족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로트레크가 물려받을 땅과 재산을 팔아버렸고, 한때 로트레크가 사랑했던 삼촌이자 첫 그림 스승이었던 찰스는 자기 집 한구석에 그가 맡겨둔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림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를 아까워한 주변 사람이 “차라리 팔아서 돈을 기부하라”고 했지만, 그조차도 부끄럽다며 싫다고 했지요.
그럴수록 로트레크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성과를 거둬서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반, ‘저질 예술가’이자 ‘명문 귀족 집안이 수치스러워하는 난쟁이’로 악명을 떨쳐서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나는 내 몸을 다 불태울 것 같아.”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로트레크는 어디에서나 스케치했고, 종이가 없으면 냅킨이나 식탁보, 때로는 카페 테이블의 대리석 상판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클럽에서 늦게까지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이런 생활을 지탱하는 핵심 연료는 술이었습니다. 물랭루주 밖에서 로트레크를 마주치는 이들은 그의 내면보다는 장애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물랭루주 안에서 로트레크는 누구나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명물이자 사교계의 스타였습니다. 술은 그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술만 마시면 로트레크는 자신감과 활력을 얻었고, 쾌활하면서도 매력적인 사람을 연기할 에너지도 샘솟았습니다. 일이 바빠지고 사교 모임이 많아질수록 술이 더 필요했습니다. 자연스레 로트레크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취하는 일이 점점 더 늘었습니다.
귀족이자 천민, 미식가이자 술주정뱅이, 예술가이자 얼간이라는 로트레크의 이중적인 성격은 당시 파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와 예술에는 세기말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녹아 있었습니다. 파괴적인 충동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이를 즐기고, 기존의 도덕적인 가치들을 거부하는 풍조였지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로트레크라는 사람과 예술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술로 지탱하는 영광은 결코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로트레크의 예술도 망쳤습니다. 더 이상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성격은 괴팍해졌고, 심각한 정신 질환 증세도 보였습니다.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로트레크의 집안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친구들이 달려왔습니다. 로트레크는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권총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별거 아냐. 거미에게 공격당해서 반격했을 뿐이야.” 그는 항상 경찰에 미행당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길 건너편에 있는 과일가게 진열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물주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99년 길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잠깐 술을 끊었던 로트레크. 하지만 퇴원하고 머지않아 중독은 재발했습니다. 다시 그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1901년 최후를 예감한 로트레크는 스스로 신변을 정리한 뒤 매년 여름을 보내던 해안가 지방에서 잠깐 요양 생활을 하다 불과 3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사후 로트레크는 한동안 제도권 예술에서 잊혔습니다. 살아있을 때도 포스터 예술로 명성이 높은 화가였지만, 순수예술 분야에서는 중요한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은 결국 사람들의 눈에 띄는 법. 10여년이 지나자 세계 각지의 주요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습니다. 이제 그의 위상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고갱이나 쇠라 등 위대한 인상주의 화가들을 뛰어넘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로트레크는 그 시대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감정 이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동시대 화가 대부분은 인간과 세상의 아름다운 면에만 집중했습니다. 반면 로트레크는 세상의 추한 면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특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찾았습니다. 이는 로트레크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그 혼돈. 그 이중성이야말로 로트레크의 삶과 작품이 품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었습니다.
로트레크는 생전 “인간은 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추한 곳에는 언제나 매혹적인 부분이 있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곳에서 그걸 발견하게 되면 대단히 기쁘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를 합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추한 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추한 면은 각자의 개성이자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그 추함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더없이 아름답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Toulouse-Lautrec: A Life(Julia Frey 지음), Toulouse-Lautrec and Montmartre(Richard Thomson, Phillip Dennis Cate and Mary Weaver Chapin 지음), Toulouse-Lautrec and La Vie Moderne: Paris 1880~1910(Phillip Dennis Cate, Belinda Thomso 지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마티아스 아놀드 지음, 박현정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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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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