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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의 유럽 첫 공장인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기가팩토리'는 작년 3월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었다. 브란덴부르크주 정부의 인허가 절차가 지연돼 당초 계획보다 1년 가까이 가동을 늦춰야했다.
당시 테슬라가 주정부에 제출했던 서류는 최소 2만5000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관료주의가 덜하면 좋겠다"며 독일 정부를 꼬집어 비판했다.
지난 2일 방문한 프랑크푸르트 소재 A 은행에서도 독일 관료주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입구부터 10m 넘게 이어진 복도 양옆으로 각종 서류가 빼곡히 찬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독일 금융당국의 감사에 대응하기 위한 자료를 모아둔 것으로 따로 마련된 서고에도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고질적인 관료주의가 독일 기업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 독일 당국의 까다로운 요구사항과 복잡한 행정절차, 거미줄 규제에 가로막혀 글로벌 혁신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딘 디지털화 속도도 각종 비효율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기업 족쇄'된 관료주의
독일 중소기업연구소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매출 2억4000만유로(약 3440억원) 규모의 기업이 준법 의무를 지키기 위해 지출한 행정비용은 매출의 1%(약 34억원)에 달했다. 당국의 깐깐한 규제와 중복된 승인 절차 등에 대응하느라 정규직 직원 40명에 해당하는 인건비를 쏟아부어야 했다. 대신 연구개발(R&D) 등 미래 투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
프리돌린 스트랙 독일산업협회(BDI) 글로벌시장 실장은 "독일인은 디테일에 강하고 모든 것에 대해 규칙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며 "이런 점이 독일을 엔지니어링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디테일에 집착한 나머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관료주의는 혁신 기업이 독일에서 탄생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독일은 창업의 용이성을 측정하는 기업환경평가에서 190개국 중 125위(2020년 기준)에 그쳤다. 영국(18위)이나 프랑스(37위)에 한참 못 미친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선 기업이 영업허가를 받기까지 40일이 걸리지 않지만 독일에선 120일 이상 소요된다.
라인트 그로프 라이프니츠할레경제연구소(IWH) 소장은 "파괴적 혁신은 테슬라와 같은 젊은 기업에서 나오는 것인데 독일의 비효율적인 행정절차는 창업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며 "자유로운 시장 진입 등 기업의 역동성이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관료주의의 곰팡이(mildew of bureaucracy)를 제거해 성장을 촉진시키겠다"며 대책을 발표했다. 기업의 장부 보관 기한을 10년에서 8년으로 줄이도록 하고, 내국인 호텔 투숙객에 대한 등록서 작성 의무를 폐기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독일의 악명높은 관료주의를 뿌리뽑기 위한 개혁으로서 강도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지털 후진국' 오명도
독일은 행정적 비효율을 완화해 줄 디지털화 투자에도 소극적이다. 독일 정부는 긴축 재정을 명목으로 내년 디지털 예산을 작년 3억7700만유로(약 5400억 원)에서 300만유로(약 40억 원)로 대폭 삭감했다. 민간 투자를 받겠다고 하지만 디지털화가 독일 정부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인공지능(AI) 투자 규모도 저조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뮌헨 무역관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AI 투자액은 6억7000만달러(약 9000억 원)로 미국(474억달러)과 중국(134억달러)의 5%에도 못 미쳤다.
독일 시민들도 디지털화에 보수적인 편이다. 독일 IFO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독일 기업 관계자의 86%가 데이터에 대한 낮은 신뢰성 등을 이유로 AI 실무 적용에 "회의적"이라고 응답했다. A 은행 관계자는 "디지털화가 되면 일자리를 잃는다는 생각이 독일인의 생각에 깊숙이 박혀있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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