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노력하는 선수는 결코 이기지 못한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스포츠 격언을 임진희(25)는 오랫동안 믿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 있는 친구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골프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끈기 있는 임진희의 모습을 지켜본 코치는 선수가 되길 권했다.
그때 알게 됐다.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선수였는지를. 낮이고 밤이고 연습해도 저 멀리 앞서간 동갑내기 박민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마추어들의 실력 가늠자 역할을 하는 국가대표 배지는 그에게 너무 높은 벽이었다. 2018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도전장을 내민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임진희는 1부와 2부 투어를 오가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골프클럽을 내려놓을 순 없었다.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다른 걸 포기한 부모님을 실망시킬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임진희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부터 고향인 제주에 홀로 남아 ‘돈벌이’를 했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임진희를 돌봤다. 그래서 임진희는 쉴 수 없었다. 오전 6시30분에 기상해 밥 먹는 시간과 이동하는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했다. 거의 모든 선수가 나이가 들면 연습량을 줄이지만, 임진희는 오히려 연습시간을 늘렸다.
“노력이 재능을 넘어선다는 걸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었다”는 임진희의 꿈이 현실이 된 건 2년 전이었다. 경기 포천힐스CC에서 열린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에서 우승한 것. 한 번 ‘봉인’이 풀리자 임진희는 다른 클래스의 선수가 됐다.
22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 물길·꽃길 코스(파72·6606야드)에서 열린 KLPGA투어 상상인·한국경제TV 오픈 2023의 최종 라운드에서도 그랬다. 코스 레코드(7언더파 65타)를 다시 쓰며 최종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올 시즌 3승으로 이예원(20), 박지영(27)과 함께 ‘다승 부문’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투어 통산 5승을 거둔 임진희는 우승상금 2억1600만원도 함께 챙겨갔다.
이날 임진희의 모습은 2년 전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 2021 최종 라운드 때와 비슷했다. 당시 3라운드까지 무려 5타 뒤진 공동 13위에 머물렀던 그는 최종 라운드에서 6언더파를 몰아치며 우승하는 드라마를 썼다. 이번 대회에서도 임진희는 3라운드까지 단독 선두를 달린 임희정(23)에게 4타 뒤진 공동 5위로 출발했지만, 7타를 줄이며 우승컵을 들었다.
임진희의 첫 위기는 7번홀(파5)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미스 샷이 결국 ‘행운의 버디’로 연결된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 최종 라운드 18번홀 때처럼 이번에도 행운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이 홀에서 욕심을 부려 2온을 노리다가 공을 코스 우측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딱’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트를 맞은 공은 다시 코스 안에 들어왔고, 임진희는 파 세이브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삐를 늦추지 않은 임진희가 리더보드 상단에 나타난 건 12번홀(파3)이다. 임진희는 이 홀에서 약 9m 버디 퍼트를 넣으면서 당시 선두였던 이소미(24)를 압박했다. 임진희는 “12번홀 버디 퍼트가 들어가는 순간 ‘우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불붙은 임진희는 15번홀(파5)에서 또 버디를 추가하며 이소미와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좀처럼 균형이 깨지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무너진 건 이소미였다. 이소미는 17번홀(파5)에서 두 번째 샷을 코스 왼쪽으로 보냈다. 세 번째 샷을 가까스로 그린 주변에 보냈으나 결국 1타를 잃은 뒤 홀을 나설 수 있었다. 승기가 완전히 임진희 쪽으로 넘어온 상황에서 임진희는 마지막 18번홀(파4) 2m 버디 퍼트까지 추가하며 쐐기를 박았다.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려 시즌 첫 승을 바라본 임희정은 최종 합계 12언더파 276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경기 초반 샷 난조에 시달려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전반을 1오버파로 마친 그는 후반 5개 홀에서 3타를 줄이는 집중력을 발휘했지만, 한참을 도망간 뒤 먼저 경기를 끝낸 임진희를 따라잡기에 1타가 부족했다. 막판까지 임진희와 우승 싸움을 한 이소미는 11언더파 277타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양주=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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