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트렌드 인사이트] 동네에도 정체성이 필요하다

입력 2023-10-25 18:28   수정 2023-10-26 00:30

“안국동에는 재킷을 입고 가야 하고요. 성수동에는 한여름에도 긴 부츠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가야 해요.”

얼마 전 학생들에게 들은 얘기다. 서울 안국동에는 한옥 콘셉트의 맛집과 카페가 많아서 재킷이나 셔츠를 입고 가야 사진이 예쁘게 나오고, 성수동은 ‘힙플’답게 스타일리시한 보헤미안 룩을 입어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하루 안에 성수동에 갔다가 안국동으로 이동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네마다 입고 가야 하는 일종의 ‘드레스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네, 지역, 도시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동네가 나름의 스타일을 입고 있다.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콘텐츠, 맛집,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페르소나를 지닌 동네로 진화한다. 본래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의미한다. 소비자학에서는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 “이것을 어떤 사람이 사용할까?”라는 질문을 통해 타깃 고객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도시 페르소나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 도시를 구성하는 라이프스타일, 관심사, 가치관, 취향, 소비형태 등이 뾰족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위계 아닌 스타일로 동네를 인지

동네가 페르소나를 입는다는 것은 두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첫째, 소비의 관점에서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 즉 계층으로 구분됐다면 이젠 수평적 기준이 더해졌다. 예를 들어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는 지역, 보헤미안 가치관을 표방하는 도시 등 차별화된 문화와 콘텐츠를 지닌 도시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화와 가치관이 담긴 지역은 수직적 상하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위계가 아니라 스타일로 동네를 인지하게 됐다는 의미다.

둘째,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지역을 인식하는 단위가 작아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면 강동구보다 성수동이 유명하고 성수동보다 연무장길이 더 많이 언급된다. 경의선길은 알지만 경의선길이 마포구에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성수동도 다 같은 성수동이 아니다. 성수의 다양한 동네 콘텐츠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제레박의 성수교과서’에는 흥미로운 사진이 하나 게시된 적이 있다. 서울숲은 ‘커피 마시러 가는 성수동’, 뚝섬은 ‘술 마시러 가는 성수동’, 성수구길은 ‘노포 뿌시러 가는 성수동’, 송정동은 ‘여기 성수동 맞아? 하는 성수동’. 이런 식으로 세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시그니처 스토어'가 핵심역량으로
이 현상의 이면에는 ‘목적형 방문’으로 소비 방식이 변화한 데 원인이 있다. 2010년대 초반부터 호텔업계에서는 ‘데스티네이션 호텔’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데스티네이션 호텔은 ‘호텔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것’, 즉 특정 호텔에 묵기 위해 가는 여행을 의미한다. 지역소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 특정 지역을 방문한 김에 맛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해당 맛집이 그 지역에 방문하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뜨는 동네에서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시그니처 스토어’가 핵심 역량으로 부상하는 추세다. 많은 사람은 성수동 부흥의 시작점으로 ‘대림창고’와 카페 ‘어니언’을 꼽는다. 두 곳의 성공으로 공장과 창고의 골조를 그대로 둔 채 건물 안의 콘텐츠를 변주하는 것이 ‘핫플’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제주의 탑동도 주목할 만하다. 롱라이프 디자인을 추구하는 브랜드 ‘디앤디파트먼트’, 코오롱스포츠의 친환경 프로젝트 공간 ‘솟솟리버스’, 버려진 목욕탕을 쇼룸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 목욕탕’이 들어서면서 거리 자체가 ‘재생’이라는 스타일을 갖게 됐다.

‘100개의 도시는 100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동네가 페르소나를 입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지역에서 대체 불가능한 ‘우리만의 것’을 찾는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지방소멸의 위기가 몰려오는 지금 우리 동네, 우리 지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쇠락한 도시의 우아한 유턴을 위해 가장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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