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려운 걸 해낸 감독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을 제치고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폴란드 출신인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만든 ‘당나귀 EO’(2022)다. 인간 배우들이 등장하긴 해도 극중 당나귀의 여정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배우는 거들 뿐 당나귀는 이 영화에서 그야말로 슈퍼히어로, 아니 슈퍼애니멀이다. (극중 EO는 동물권 보호 차원에서 여섯 마리의 당나귀가 번갈아 연기했다!) 이건 단순한 상찬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EO는 토끼마냥 두 귀를 바짝 올리고 소처럼 순한 눈을 끔벅끔벅 뜨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근데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행복한 건지, 위험이 닥친 걸 아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그게 엄청난 ‘드라마’로 작용한다. 드라마는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를 때 긴장감이 배가 되는 법이다. 그건 우리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다. 반려동물과 가족같이 지내면서 한편으로 학대하는 양가의 면모도 있어 단독으로 인간 세상에 나선 EO가 해코지당하지 않을까 마음 졸이게 된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EO는 전진만이 본능이라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쫄래쫄래 앞만 보며 나아간다. 영화의 카메라는 당나귀의 등에 올라탄 듯 EO의 발걸음에 맞춰 들썩들썩하는 시점으로 앞을 비춘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영화가 EO의 시점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서다. 그러니까 ‘당나귀 EO’에 부제를 붙이자면 우~왕 우왕 우! 왕! ‘인간 탐험 신비의 세계’다. 우리가 극중 EO의 심정을 잘 모르듯 EO가 바라보는 인간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EO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실은 서커스단에서 함께한 인간 단원에게만큼은 호의적인 마음이 있는 듯하다. 서커스 단원이 떠난 후 EO는 그리웠는지 울타리를 부수고 나와 인간 단원을 찾겠다고 길을 나섰다가 그만 방황하는 신세가 된다. 그때부터 영화는 EO의 눈에 비친 인간사를 전시하는데 가령, 두 패로 갈려 각자의 축구팀을 응원하던 팬들이 승패가 갈리자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패한 팀의 응원단이 우승 축하를 벌이던 승리 팀 팬들의 파티장에 난입해 서로가 죽일 듯 싸우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란 참 몹쓸 존재다.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감독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의 주체는 당나귀, 혹은 신의 존재다. 어쩌면, 당나귀를 신의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EO의 일인칭 시점이 아닐 때 영화가 비추는 건 대자연을 경외에 차서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이다. 그 자연의 한가운데 있는 EO는 그저 한 마리의 당나귀가 아니다. 자연을 초월한 존재 같다. 영화의 마지막, 도축장에 갇혔던 EO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철문을 열어 그 밖으로 향한다. 그게 인간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는 건지, 아니면 천국으로 향하는 일종의 은유 같은 건지 영화는 모호하게 처리했다.
확실한 한 가지, EO는 인간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이다. 구원 가능성은 거기에 있을 테다.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는 동물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 영향 아래 있는 EO의 여정은 수난사에 다름 아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수난의 배경을 제공한 인간이다.
‘당나귀 EO’는 동물의 시선과 입장에서 인간 세상을 비춤으로써 인간의 각성을 촉구한다. 세상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자연의 공간이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제공하는 EO는 인간 세상을 교정할 수 있는 신의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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