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좀 천천히 늙어 갔으면

입력 2023-10-26 18:56   수정 2023-10-27 00:03

바람이 분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발길은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뒹굴던 낙엽이 바스러진다. 수척수척, 시냇물 소리 들린다. 나이 들어가는 소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늙는다는 건 몸 안에 생명의 물기가 줄어드는 것. 요실금이 생긴다든가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게 되면 그대는 중년의 가을을 앓기 시작하는 것이다.

직장은 세월 기우는 소리와 거리가 멀다. 중년이 돼도 우리는 격무 중이다.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하는 시간이 줄지 않는다. 생명의 물기가 조금씩 말라가는 건 왜 모를까. 자연을 멍하니 바라보는 ‘산멍’ ‘바다멍’ ‘불멍’이 그립다. 이번 주말엔 좀 자유로웠으면…. 중년 남자를 가을 속으로 방생해 보자. 때론 애상(哀傷)의 센티멘털리즘도 인생을 사랑하는 양식이다. 책갈피에 끼워둔 오랜 단풍잎을 꺼내 본다. 듣는 이 없는 가을 노래를 고조곤히 불러보리라.

시월의 밤, 대삼각형 별자리 사이로 화살보다 빠르게 유성이 떨어지네. 하루 동안만 만나고 나머지 날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구나. 우리 역시 비끼어 떨어지는 저 유성과 비슷하리.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가뭇없이, 흔적도 없이, 죽음을 향해 비스듬히 곤두박질치리라. 며칠 뒤면 시월의 마지막 밤을 맞을 테지.

마지막이란 말이 주는 쓸쓸함이여, 세상에 쓸쓸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연년세세화상사(年年世世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世世年年人不同),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 그 모습 비슷도 하건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의 모습은 같지 않구나.” 당나라 시인 유희이는 늙음을 이렇게 애달파했는데, 가을의 끝자락에 오니 봄꽃 지는 애절함만큼이나 가을 잎 지는 쓸쓸함이 깊어만 간다. 내 인생의 남은 유효기간이여, 바라건대 좀 천천히 늙어 갔으면.

가을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슬픔에 젖지 않았으면. 백수(白壽)가 내일모레인 어머니 앞에서 내가 먼저 아프지 않았으면. 난치병과 싸우는 친구에게도 봄꽃 같은 소식이 찾아왔으면. 아아, 설레는 가슴으로 이따금 도란거릴 수 있으면. 바라건대 바라건대 좀 천천히 늙어 갔으면.

지난해 봄에 결혼한 며느리가 똑같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았으면. 그 아이에게 인생의 순수를 다시 배울 수 있으면.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불타와 아인슈타인과 셰익스피어의 닮은 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많이 기다려야 할 테지. 이런 기다림은 지나친 욕심인가. 그래도 내 중년의 가을은 서편 하늘 노을만큼이나 괜찮게 이슥하구나. 지는 노을의 찬란한 옷자락을 붙잡을 수 있으면. 바라고 또 바라건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사랑해줄 수 있으면. 오직 그런 이유로 천천히 늙어 갔으면. 조금만 더 천천히 늙어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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