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은 ‘오페라 위크’였다. 국내 양대 오페라 공연장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26~29일 각각 벨리니의 ‘노르마’(연출 알렉스 오예)와 푸치니의 ‘투란도트’(연출 손진책)를 자체 기획·제작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들은 현대 오페라 연출의 주요 트렌드인 ‘레지테아터’(연출가 중심의 극)가 원작을 얼마나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레지테아터는 오페라 대본(리브레토)과 음악은 그대로 살리면서 시·공간적 배경을 연출가의 해석과 의도에 따라 원작과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 두 공연 모두 현대적인 연출과 접근이 신선했다. 단, 퍼포먼스와 내용이 원작과 동떨어진 대목이 많아 오페라 애호가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린 무대였다.
무대를 빼곡히 메운 3500여 개의 십자가,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섬세한 조명…. 그로테스크한 무대로 서울을 찾은 영국 로열오페라 버전의 ‘노르마’가 지난 26일 베일을 벗었다.
이날 공연은 타이틀 롤인 소프라노 여지원(노르마)을 비롯해 메조소프라노 테레사 이에르볼리노(아달지사), 테너 마시모 조르다노(폴리오네), 베이스 박종민(오르베소) 캐스팅으로 막이 올랐다.
이 작품은 201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됐다. ‘천재 연출가’로 불리는 알렉스 오예가 연출을 맡아 이탈리아 작곡가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사회지도자인 여사제 노르마의 금지된 사랑과 배신, 숭고한 희생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175분간 현대적인 연출과 입체적인 캐릭터로 관객을 압도했다. “현시대와 호흡하는 오페라”라는 연출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무대였다. 스토리 곳곳에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살리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예컨대 무대 및 의상은 여러 시대와 국가를 섞어 연출했다.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장면은 정통 가톨릭교를 연상하게 했다. 노르마를 둘러싼 교도들은 하얀색 고깔모자 복장을 했는데 이는 미국 KKK단의 복색과 비슷했다. 사랑과 화합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사회적 압제와 폭력으로서의 종교를 표현하는 듯했다.
노르마, 폴리오네, 아달지사 등 세 남녀의 치정을 다룰 때는 마치 주말 드라마처럼 완전한 현대의 모습으로 연출했다. 여사제라는 사회적인 역할과 한 명의 여성이자 어머니라는 개인의 역할을 크게 대조하기 위한 장치로 보였다. 다만 호불호가 크게 갈릴 만했다. 일각에서는 “로마군 이야기가 나오다가 현대로 회귀하니 갑작스럽고 어색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 오페라의 성패는 단연 여주인공 노르마의 역량에 달려있다. 성악적으로 고난도 기술을 구사해야 하고 누구보다 복잡다단한 인물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1막의 아리아 ‘카스타 디바’(정결한 여신)는 모두가 숨죽이고 노르마만을 바라보는 대목.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한 전설적인 소프라노들이 불러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무반주에 가까울 만큼 관현악 반주가 절제된 가운데 벨칸토 오페라 특유의 화려한 꾸밈음과 힘 있는 고음으로 무대를 홀로 압도해야 하는 곡이다.
여지원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높은 곳에서 ‘정결한 여신’을 불렀다. 그는 여사제다운 성스러움과 사랑으로 불안에 떠는 인간적인 면모를 섬세하게 연기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성량과 음색의 선명함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다. 표현력은 빼어났지만 아쉬운 발성으로 압도적인 힘은 떨어졌다.
그런데도 이번 공연은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로 공감을 자아냈다. 노르마뿐 아니라 그의 연적인 아달지사 캐릭터도 세심하게 그려냈다. 아달지사는 일반적인 연적 캐릭터와 달리 노르마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연대하려는 인물로 표현됐다. 이들의 호흡은 노르마와 아달지사의 이중창에서 잘 드러났다. 두 음색의 상호 보완적인 어울림은 스토리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2막 후반부에서는 휘몰아치듯 노래하는 ‘전쟁의 합창’이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노르마를 단죄하려는 군중의 광기와 분노가 선명하게 표현돼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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