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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쟁 후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
중동발 원유시장 위기에 신나는 마두로
점점 꼬이는 미국의 대외전략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분쟁이 불타오르자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제재 완화 작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미국 정부는 18개월여간의 협상 끝에 이달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 제재를 6개월 동안 해제하고, 국채의 2차 거래를 허용했다. 대신 베네수엘라는 다수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내년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하면 미국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석유 자원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는 한 때 일일 산유량이 300만배럴을 넘었으나, 2010년대 후반 미국과의 관계 파탄과 함께 경제도 파탄이 났다. 2018년 베네수엘라 대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과 외교 단절을 선언했고, 미국은 마두로 정권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규정하고 베네수엘라와 거래하는 제3자도 제재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포퓰리즘 적자재정과 무분별한 화폐 발행으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베네수엘라는 제재 이후 말 그대로 화폐가 휴지가 됐다. 주민들이 지폐로 수공예품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700만명이 넘는 베네수엘라인이 해외로 탈출, 난민과 다름없는 신세로 해외를 떠돌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이달초 이스라엘을 공격한 팔레스타인 하마스 덕분에 베네수엘라가 고통의 세월 끝에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를 기회로 다시 일어설지, 아니면 국제 정치의 또 다른 불씨가 될지 주목된다.
러시아·이란에 비하면 베네수엘라 정권은 '양반'
미국이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이다. 러시아산 석유 수출 제재로 오일쇼크급 충격이 우려되자 전세계에 원유를 공급할 대안으로 베네수엘라가 떠올랐다. 평화롭던 시기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해 자국민을 탄압하던 마두로 정권이 극악무도하게 비춰졌으나, 최근 유혈 분쟁이 잇따르자 평가가 달라졌다. 인접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영토를 점령하려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 이슬람 테러집단을 지원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란에 비하면 '양반'이란 얘기다. 강경한 자세를 고수해온 미 공화당 의원들도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고 때문에 무작정 수 천㎞를 걸어서 미국 남부 국경으로 몰려드는 베네수엘라 난민들의 끝없는 행렬을 막을 필요가 있다는 점도 이 같은 결정의 배경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우선 자국 석유회사 셰브런과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PDVSA의 합작기업의 석유 수출을 허용했다. 합작회사는 현재 일일 약 13만5000배럴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제재가 계속되고 있어 본격적인 증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EIA)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베네수엘라의 산유량은 일일 평균 78만 5000배럴 수준으로 1년 전과 비슷하다. 셰브런은 제재가 풀리면 수 년안에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을 일일 100만 배럴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제재 완화안에는 미국 등 외국 기업이 베네수엘라 PDVSA와 협력하거나 거래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미국 내 자산 약 30억달러의 동결 해제도 검토될 전망이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이란, 중국, 러시아 등 고의로 미국 제재를 위반할 수 있는 국가들에게만 헐값에 원유룰 팔아야만 했다. 제재 완화 조치가 완료되면 서방국가들에 석유를 판매할 뿐 아니라 대규모 투자도 유치할 수 있을 전망이다.
뜻밖의 변수, 마두로 대통령 제 밥상 걷어차나
미국의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는 그러나 큰 암초를 만났다. 야당인 '벤테 베네수엘라'(VV)의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정책고문(55·사진)이 지난 24일 야권 경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면서 후보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마차도 고문은 마두로의 측근이 수장을 맡은 감사원으로부터 부패 혐의 등을 이유로 15년간 공직 취임 금지 조치를 받은 상태다. 마두로 대통령은 230만명이 참여한 이번 야당의 경선을 무효라고 일축하며 검찰을 동원해 수사에 나섰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 완화의 조건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주 베네수엘라 정부는 발표를 통해 야당 대표 그룹과 공식 협상을 재개하고, 내년에 국제선거감시단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다만 마두로 정부가 공언한 협상은 '마차도를 제외한' 야당 대표그룹과의 협상이었다.
마두로 대통령이 내년 3선에 도전하며 야당 후보 마차도를 탄압할 경우, 미 공화당 강경파 등에선 '당장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 완화를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최악의 20년...또 관계 꼬이나
미국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번 제재 완화 조치가 마두로 대통령의 독재 정권에 날개를 달아줬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정부의 제재는 마두로를 축출하지 못하고 베네수엘라 경제만 붕괴시고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베네수엘라가 협정의 조건을 준수하지 않으면 우리가 취한 조치를 뒤집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FT는 "마두로 정권이 야당 후보 마차도에 대한 복권을 검토만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내년에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행정부도 베네수엘라 제재를 되살려 국제 유가를 급등시키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두로 대통령이 정권 연장에 성공할 경우 베네수엘라는 국제 정치와 원자재 시장의 큰 위험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미국이 베네수엘라 제재를 시작한 것도 반미(反美) 사회주의자인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석유자원 국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과거에 석유를 국유화했지만, 차베스와는 결이 다르다. 사우디 왕가는 돈을 주고 아람코 지분을 매입한 반면, 차베스 정부는 서방 석유 기업 자산을 사실상 몰수했다. 차베스 전 대통령을 계승한 마두로가 정권을 연장하고 글로벌 원유시장에의 지분율을 높일 경우 향후 미국과 자원 시장 분란의 중심이 될 가능성도 높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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