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톡發 훈풍' 부는 리걸테크…생성 AI로 법조 판 바꾼다 [긱스]

입력 2023-11-01 18:06   수정 2023-11-03 17:16

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각종 규제와 직역단체와의 갈등으로 숨죽여 왔던 리걸테크(법률+기술) 스타트업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법률 플랫폼 로톡과 대한변호사협회 간 분쟁에서 법무부가 로톡의 손을 들어주면서 리걸테크 업체들은 인공지능(AI) 서비스 개발을 본격화하는 등 사업 확장에 나섰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리걸테크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라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다만 복잡한 변호사 광고규정 등 핵심 규제가 여전해 성장 변곡점에서 다시 한번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I에 꽂힌 K리걸테크

1일 스타트업 업계에 따르면 법률 스타트업 로앤굿은 최근 변호사용 AI 챗봇 시제품인 ‘로앤봇’을 공개했다. 5년간 포털에 공개된 4360쪽의 결정문과 판례집을 학습시켰다. 문장에서 의미와 문맥을 잡아내 키워드 없이도 비슷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최호준 로앤굿 부대표는 “검색증강생성(RAG) 기술을 활용해 국내법에 특화된 챗봇으로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규제 리스크 때문에 그동안 기술 투자에 소극적이던 리걸테크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AI 제품 개발에 나서는 모습이다. 로톡 운영사인 로앤컴퍼니는 미국 오픈AI의 GPT-4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를 활용해 만든 ‘빅케이스GPT’가 변호사시험 객관식 문제에서 53.3% 정답률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김본환 대표는 “변호사 성과를 높일 수 있는 AI 서비스를 곧 출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내년 상반기 ‘슈퍼로이어’라는 이름의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를 내놓는 게 목표다.

에이아이옥션은 법인세 데이터 700쪽을 학습시킨 AI 시스템 ‘K-엔진’을 공개했다. 법인세 분야로 시작했지만 종합부동산세와 상속세 등 세무 영역 전체로 서비스 범위를 확장하겠다는 계획이다. 법률 AI 기업인 인텔리콘연구소는 서울시와 학교폭력 법률상담 시스템 개발을 위한 협약을 맺고 AI 고도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자체 개발한 AI 상담 솔루션 ‘법률GPT’를 학교폭력에 특화된 시스템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로톡발 ‘훈풍’ 이어질까
법무부가 로톡을 이용하다 변협에서 징계를 받은 변호사 123명이 낸 이의 신청을 지난달 받아들이면서 규제 리스크가 줄어들자 업계가 다시 꿈틀대고 있다. 한 리걸테크 회사 관계자는 “변협과의 갈등 이슈가 워낙 커서 신사업에 투자하기 어려웠는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로앤컴퍼니가 2020년 출시한 AI 형량 예측 서비스가 변협의 문제 제기로 10개월 만에 중단되는 등 오랜 기간 얼어붙어 있던 시장 분위기가 최근 들어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이다.

벤처캐피털(VC)도 리걸테크 투자를 이전보다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다. 최근 법률 AI를 개발하는 넥서스AI가 하나벤처스 등에서 20억원의 시드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다. 이번 법무부 결정에 앞서 투자의사 결정이 완료됐지만 그동안 ‘돈맥경화’에 시달려 온 리걸테크 스타트업들엔 긍정적인 신호다. 지금까지 누적 100억원 이상 투자를 유치한 국내 리걸테크 스타트업은 로앤컴퍼니와 로앤굿, 판례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엘박스 세 곳밖에 없다.
“생성형 AI의 최적 분야는 법률”
글로벌 생성형 AI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법률 분야 AI 기술력을 확보한다면 초기 단계인 국내 리걸테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트랙슨에 따르면 리걸테크 기업 수는 미국 2917개, 인도 713개, 영국 621개다. 한국은 31곳뿐이다. 전 세계 리걸테크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은 9곳이나 되지만 아직 한국에는 한 곳도 없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 시장이 성장할 여력이 더 크다는 뜻이다.

정확도가 중요한 법률 영역에선 AI가 정보를 처리하면서 발생시키는 오류인 ‘환각’ 문제를 해결하는 게 관건인데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환각 현상도 줄고 있다. 안기순 로앤컴퍼니 법률AI연구소장은 ‘리걸테크 AI 포럼’에 참석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법률 업무에 AI를 사용하지 않는 선택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법조인들은 업무 특성상 대량의 문서를 읽고 분석해야 하는데 이 업무를 AI가 대체할 것이란 얘기다.

AI 경쟁력을 갖춘다면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과의 경쟁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지난 9월 사우디아라비아 법무부 대표단이 로앤컴퍼니와 인텔리콘연구소 등 한국의 리걸테크 스타트업을 찾아 AI 기술력을 확인하기도 했다.
“판결문 공개 확대돼야”
오랜 기간 억눌려 있던 국내 리걸테크 시장에 제대로 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선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AI 고도화에 필수적인 데이터인 판결문 공개다. 현재 하급심 판결문은 기본적으로 비공개인 데다 법원에 열람 신청을 하려면 사건마다 부여된 사건번호를 알아야 한다. 안기순 소장은 “이전 정부에서 판결문 공개를 권고했고 현 정부에서도 공개하자고 하는데 사법부와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걸테크산업을 진흥시킬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특별법에서 리걸테크를 명확하게 정의한 뒤 현행 변호사법상 여러 규제에 대해 면제 규정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국회엔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변호사 광고를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변호사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일각에선 변호사 단체와의 갈등이 재발될 가능성도 점친다. 변협은 이번 법무부 발표 후 “변협 징계의 정당성이 인정된 것”이라고 해석하며 추가 대응을 시사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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