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일 서민 물가와 직결되는 가공식품의 담당 공무원을 지정하는 ‘전담 관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또 각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날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가 1년 전보다 3.8% 오르며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2012년 1월 이명박 정부가 전담 공무원을 지정한 ‘물가관리 책임실명제’와 닮은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물가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범부처 특별물가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회의에서 “물가 가중치가 높고 서민 체감도가 높은 빵, 과자, 커피, 라면,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과 국제 가격 상승세가 유지되고 있는 설탕 등 주요 품목에 대해 담당자를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시장 동향을 수시 점검하고 (업계와의)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빵 과장’ ‘라면 사무관’ ‘커피 주무관’ 등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신선식품은 지금도 품목별 담당자가 있지만 가공식품은 그동안 담당자를 별도로 두지 않았다”며 “할당관세 등 각종 물가 정책이 해당 품목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모니터링하고, 부당한 가격 인상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 부총리도 회의에서 “각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이 돼 소관 품목 물가 안정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각오로 철저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식품 가격이 안정돼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낮출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12개 주요 품목을 가중치(전체 1000)별로 보면 식료품·비주류음료가 154.4로 주택·수도·전기·연료(171.6)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특히 10월 식료품·비주류음료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6.7% 뛰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3.8% 중 기여도는 1.09%포인트로 전체 품목 중 가장 높았다.
전문가 "인위적으로 가격 누르면 나중에 한꺼번에 올라 부작용"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가공식품에 전담 공무원을 지정하는 동시에 다른 주요 품목은 소관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정해 물가를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했다. 예컨대 휘발유 가격은 산업통상자원부, 가공식품 가격은 농림축산식품부, 통신비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학원비는 교육부가 담당하는 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2일 각 부처 차관들은 앞다퉈 물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대전 홈플러스를 찾아 김장 재료와 라면 가격 동향을 점검했다. 식품 판매대에서 최근 가격 인상이 우려되는 배추, 무 같은 김장 재료와 커피믹스, 라면 등의 가격을 파악했다. 강경성 산업부 2차관은 서울 동작구의 한 주유소를 찾아 정부의 유류세 인하 조치가 현장에서 제대로 반영됐는지, 인근 주유소에 비해 기름값이 과도하게 높지 않은지 등을 살펴봤다. 이번 현장 점검은 지난달 ‘석유시장 점검단’ 발족 후 처음 이뤄졌다. 점검단엔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관계부처와 석유공사, 석유관리원이 참여했다.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은 서울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해 정부의 천일염 비축분 방출 현황과 수산물 할인 행사를 둘러봤다.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물가와 민생 안정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총력 대응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이명박 정부 때 품목별로 전담 공무원을 둬 물가를 잡으려 한 것과 비슷한 대책을 꺼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1월 재임 당시 “생필품을 포함해 물가가 올라가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을 못 봤다”며 “품목별 물가관리 목표를 정해 일정 가격 이상 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10년 2.0%에서 2011년 4.0%로 급등한 상황에서 나온 대책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MB식 물가 관리제’의 실효성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조경엽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연구실장은 “주요 품목 가격은 수입물가 변동과 세금 등이 훨씬 큰 변수로 작용한다”며 “전담관리제는 이명박 정부 때 실패한 대책으로 결론이 났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가 전담관리제를 도입한 201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였다. 당초 물가 예상치였던 3%대 초반보다 낮아지긴 했다. 하지만 당시 제조업을 비롯한 경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침체되면서 수요 부진으로 물가가 낮아졌을 뿐 전담관리제 효과는 미미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특히 정부가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물가를 인위적으로 누를 경우 나중에 물가가 한꺼번에 튀어 오르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가 상승 압력이 큰 상황에서 정부가 전담 공무원을 둬 물가를 관리하는 게 큰 효과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기업들은 정부가 제품값 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국세청 세무조사나 공정위의 담합 조사를 동원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강경민/황정환/이슬기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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