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내걸었던 이 유명한 선거 운동 문구는 제2차 세계대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최신작 <대해전, 최강국의 탄생>에서 말하는 바다.
책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대전 동안 벌어진 해전을 다룬다. 고(故) 이언 마셜의 삽화와 함께 치열하고 긴급한 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단순한 전쟁 역사책은 아니다. 예일대 국제안보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는 케네디는 지정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이 책은 다극 체제였던 세계가 어떻게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로 변하게 됐는지를 탐구한 책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인 <강대국의 흥망>과 맞닿아 있다. 최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입지가 흔들리는 오늘날, 불확실한 앞날을 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길잡이가 돼 줄 수 있는 책이다.
1939년 이전에 강한 해군을 보유한 나라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이었다. 제법 힘의 균형을 이뤘다. 1922년 체결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영향도 있었다. 영국과 미국 해군이 각각 세계 전함의 30% 전력을 갖도록 제한했다. 일본은 20%,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10%를 할당받았다.
독일이 해군력을 급격히 키우며 균열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 영국 해군은 겨우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후 일본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기지를 공격하면서 균형은 완전히 반(反)연합국으로 넘어간 듯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지만 한동안 고전했다. 1943년 초 미국 해군에는 태평양전쟁에 투입한 한 척의 플리트 항공모함밖에 남지 않았다.
변화는 1943년 시작됐다. 책은 ‘미국의 물량 공세’를 핵심으로 꼽는다. 케네디는 “1943년 말 이후로 문제는 승리 여부가 아니라 ‘언제 바다에서 승리하느냐?’였다”고 했다. 미국의 가공할 만한 생산력을 보여주는 게 당시 새로 개발한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 1943년 6월 처음 진수한 이후 거의 매달 한 척씩 전장에 투입했다.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전투기 등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이 되자 일본과 독일 해군은 괴멸 상태가 됐다. 연합군인 프랑스와 영국 해군도 비슷했다. 균형은 무너지고 미국의 압도적인 힘만 남게 됐다.
케네디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브로델은 구조적 요인을 강조한다. 지리, 기후, 거리, 경제, 산업, 기술 등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승리는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케네디는 말한다. 많은 역사가가 태평양전쟁의 분기점으로 보는 미드웨이 해전조차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게 케네디의 입장이다. 1942년 6월 일본과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패했더라도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금방 전력을 회복했을 거란 얘기다.
이 책은 케네디의 전작인 <강대국의 흥망>의 논점과 이어진다. 그는 1987년 펴낸 이 책에서 무분별한 군사력 증강과 경제력 쇠퇴가 강대국의 쇠락을 불러온다고 했다. 미국이 일본 및 소련과의 경쟁에서 이기면서 한물간 책으로 여겨졌지만, 정권을 잡은 네오콘이 이라크전쟁 등으로 국력을 낭비하고 중국이 빠르게 부상하면서 재조명받았다.
<대해전, 강대국의 탄생>은 2차 세계대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당시 미국은 전장과 멀리 떨어진 덕분에 제조 시설이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 지리적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국의 제조 생산력은 많이 훼손됐다. 당시 미국 경제력은 나머지 주요국을 합친 것보다 컸지만, 지금은 중국이란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경제 대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도 다르다.
700쪽이 넘는 두께지만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케네디의 글솜씨 덕분이다. 학자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솜씨를 가진 그는 이 책에서 ‘내러티브’와 ‘분석’이란 두 가지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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